혜경궁 홍씨, 헌경왕후,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어머니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년 8월 6일/음력 6월 18일 ~ 1816년 1월 13일/1815년 음력 12월 15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왕세자빈, 추존왕비로, 대한제국의 추존황후이기도 하다. 영조의 차남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어머니이다.
봉수당에서의 회갑연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이었으나 고종때 왕후로, 다시 황후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
(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로,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로도 알려져 있다.
흔히 경의왕후(敬懿王后)라 하지만 죽은 후 받은 시호가 헌경이었고 의(懿) 자는 황후로 추존된 후 받은 제호(帝號)로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한중록의 저자이다. 본관은 풍산이다.
생애
선조의 7대손으로, 선조의 부마 홍주원과 정명공주의 후손이다. 1735년에 한성부 반송반에서 홍봉한(洪鳳漢)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첫째 딸로 태어나, 영조 20년인 1744년에 10세의 어린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낳은
아들로는 의소세손과 정조가 있다.
나경언 사건
1762년 5월 22일에 나경언이란 자가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고변하자, 영조는 친히 국문을 하였다. 나경언은 액정별감
나상언의 형으로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속였다. 가산이 탕진되어 자립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세자를 제거할 계책을
내어 형조에 글을 올렸다.
1762년 7월 4일(윤5월 13일) 부왕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는 참혹한 형벌을 내렸다.
1762년 7월 12일(윤5월 21일)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자는 뒤주에서 나오지 못하고 폭염 속에서 사경을 헤매었고 결국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아사(餓死)하였다. 영조가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홍씨에게는 '혜빈(惠嬪)'
의 호를 내렸다.
임오화변의 원인으로 영조가 노론을 견제키 위해 키운 외척계 탕평당인 홍봉한 계열과 영조의 탕평에 반발하던 노론계의
대립으로 기행을 일삼던 사도세자 문제가 정치적으로 떠올랐는데 반 탕평파에서 홍봉한을 공격하기 위해 그의 약점이던
사도세자 문제를 정치 문제화 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홍봉한은 이를 덮기 위해 뇌물까지 제공하며 은폐하려 했지만 나경언의 고변까지 들어가고 더이상 어쩔 수 없는 상태까지
오자 영조가 종사를 위해 아들을 포기했고 손자를 지키기 위해 홍봉한에게 자신의 명을 따르도록 종용했다고 한다.
당시 상당한 상소에서 사도세자의 비행을 은폐하는 홍봉한에 대한 공격이 나온다.
1775년에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홍인한은 극력 반대하였고, 이 문제로 정조의 미움을 사서 정조 즉위 후
사사된다. . 홍봉한은 1770년(영조 46년)경 반대파 김귀주, 정후겸의 공격으로 정계에서 영원히 은퇴하고 봉조하의
직함으로 교외에 거주했으며 이후에도 이복동생이던 홍인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형을 배신했다고 정조가 말한적이 있다.
사도세자 생전부터 있었던 정순왕후 외척가문과의 정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에도 김귀주 정파의 홍봉한 탄핵이
여러번 있었으며 정조 즉위초에도, 정조 사후에도 이들이 홍봉한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사도세자의 추숭에 대해 당시
세손이던 정조와 사석에서 홍봉한이 나눈 이야기를 김귀주가 영조에게 고자질해서 홍봉한을 역적으로 몰기도 했었다.
정조의 등극
1776년에 영조가 83세에 서거하고, 대리청정하던 세손 이산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등극하니,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어머니 혜빈 홍씨 역시 '혜경궁(惠慶宮)'으로 궁호가
높아졌다.
당시 왕실에서 혜경궁 홍씨가 제일 연장자였으나, 서열상 10살 아래인 정순왕후가 대비의 위치를 차지하여 왕실 서열상
제2위의 위치에 있었다.
1795년 그녀가 회갑을 맞는 해에, 혜경궁 홍씨는 회고록인 《한중록》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해서 궁중문학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훌륭한 회고록이라는 평가와 단지 자신이 사도세자의 죽음 때 어쩔 수 없이 수수방관했다는 변명과
당시 역적으로 몰려 있던 그녀의 집안의 명예 회복을 위한 말 등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한 여인의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두 개의 극명하게 대비되는 평가가 있다.
생애 후반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조의 아들이자 혜경궁 홍씨의 손자인 순조가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15년 뒤인 1815년에 창덕궁
경춘전에서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며 헌경빈(獻敬嬪)의 시호를 받았다. 순조 즉위 직후 혜경궁은 아들 정조의 약속을
이유로 친정에 대한 신원을 요구했고, 1814년(순조 14년) 그의 친정집은 신원, 복권된다.
또한 홍봉한의 죽음 직전에 그를 비난했던 정이환, 이심도 등의 처벌을 요구한다. 이심도는 사형에 처해진다.
1899년에 장헌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자, 함께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903년에 장조가 '장조의
황제(莊祖懿皇帝)'로 격상되자 그녀 역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되었다.
사후
능은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융릉(隆陵)으로 남편인 장조와 함께 묻혀 있으며 인근에는 아들 정조와 며느리인 효의
왕후의 능인 건릉(健陵)도 위치하여 있다.
평가
한중록은 청상과부가 된 그녀를 동정하는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헌경왕후를 남편을 구할 생각은 별로 없었고, 오로지 친가의 명예와 세손인 정조밖에 모른 비정한
아내로 비판하고 있다. 특히 이덕일은 한중록과 영조실록, 정조실록, 어제장헌대왕지문 등의 기록 차이와 오류를 지적
하여 비판을 가하기도 했지만 사도세자 관련 한중록과 실록과의 차이는 없으며 오히려 이덕일이 실록등의 기록을
오독하거나 고의로 왜곡하여 한중록을 비난하는데 사용하였다.
어제 장헌대왕지문은 정조가 직접 죽은아버지를 위해 지은것으로 정신병등의 난행기록은 빼고 기록하였을뿐 거짓
이라고 한적이 없다. 죽은이를 위해 짓는 행장등에서 그 주인공을 비난하는 일은 전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