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정사를 독단적으로 처리하다. 중종 반정으로 폐위되다.
연산군(燕山君, 1476년 11월 23일 (음력 11월 7일) ~ 1506년 11월 20일 (음력 11월 6일), 재위 1494년 ~ 1506년)은 조선의 제10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융(㦕), 본관은 전주(全州) . 성종의 장남으로 폐비 윤씨의 소생이며,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모후 폐비 윤씨의 폐출 이후 정현왕후의 손에 자랐으나,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임을 알았다. 그 뒤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숭하려 하자, 성종의 유명을 내세워 왕비 추숭을 반대한 사림파 문인들과 충돌하다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빌미로 사림파를 제거했다.
또한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빌미로 발생한 갑자사화에서는 사림파와 양대 파벌을 이루던 훈구파와도 절연하여, 사림파를 적대세력으로 훈구파를 비호감세력으로 만들어 독단정치에 접어들었다.그 뒤로 사림파의 간쟁을 일절 무시하고 훈구파의 공적을 과거로 치부해 정사를 독단적으로 처리하였다. 국왕 보좌기관이던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예문관 등을 대폭 축소하거나 감원하고, 유가와 불가의 대표적인 기관인 성균관과 원각사 (圓覺寺)를 기생 양성소와 유흥장으로 만들어 국초(國初)의 여러 제도를 폐지하고 욕보였다. 그 밖에 민간 여자들과 반가의 사대부가의 여자들을 자의 혹은 강제로 입궐시켜 성관계를 갖는 등 치세 후반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종친을 두고도 파격적인 언행을 일삼아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에 관여된 성종의 후궁들을 몽둥이로 때려 숨지게 한 뒤 무덤 줄만 못한다 하여 그 시체를 들판에 짐승의 먹이로 내다버리게 하였으며, 인수대비의 초상 때는 인수대비가 3년상을 받을 사람이 못 된다 하여 3년상 대신 25일로 장례를 마쳐 유학자들의 비난을 초래했다.
사림파의 증폭되는 불만(不滿)과 훈구파의 부당(不當)하다는 여론 속에 중종 반정으로 폐위되었으며 강화군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었다가 곧 그해 11월에 사망했다.진성대군(중종)의 이복 형이자 처고모부가 된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지목되고 있다. 모후인 폐비 윤씨가 폐위되기 전에 태어나 세자로 책봉되었으므로 대군으로 강등되어야 했으나 중종 반정 직후 후궁 소생 왕자들에게 부여되는 군으로 강등당했다. 허침, 조지서, 정여창의 문인이다.
출생
연산군은 1476년 11월 23일 (음력 11월 7일) 조선 성종과 제1계비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어날때부터 왕비 소생의 장자인 원자(元子)로 불렸다.그러나 후궁이 많았던 부왕 성종과 폐비 윤씨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고,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을 기회삼아 후궁들과 인수대비는 윤씨를 왕비에서 폐하고 궁궐에서 축출한다.
1483년(성종 14) 세자에 책봉되었고, 허침(許琛)·조지서(趙之瑞)·서거정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는 연산군 외에 제2계비인 정현왕후 소생 진성대군(훗날의 중종)이 태어났으나 성종이 승하할 당시에는 세자 이융의 나이가 18살이었으므로 대세를 피할 수 없었다.
세자 시절
그는 어려서 생모인 폐비 윤씨가 아닌 계모 정현왕후의 아들인 것처럼 성장하였다. 일설에는 이후 폐비 윤씨의 소생 연산군은 그를 생모로 알고 자라다가, 성종의 묘비명과 행장을 쓸때 제헌왕후 윤씨의 사사 사건을 알게 되면서 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학살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설도 있다. 역사학자 이덕일에 의하면, 정현왕후는 친정아버지 윤호와 사촌 윤필상 등과 짜고 윤씨를 폐출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덕일은 성종이 오래 살았더라면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었다고 보았다.
역사학자 이덕일에 따르면 소년기에 자신이 정현왕후의 친아들이 아니며 폐비 윤씨가 폐출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종은 특별히 허침, 서거정, 조지서, 정여창 등에게 세자를 가르치게 하였다. 스승들 중 허침은 연산군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반면, 조지서는 정해진 대로 가르치려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배우기를 아니 좋아하여 그 누구든 배우라고 타이르려 하면 "이제 그런것은 잡기(雜技)이다"라며 되려 타이르려 하였다.
이에 허침은 연산군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정해진 것이니까 배우라고 부드럽게 권하였고 조지서는 '자꾸 제 말을 안 들으시면 상감마마께 고하겠습니다'라 하여 연산군과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에 연산군이 벽에 '허침은 성인이고, 조지서는 소인배'라는 낙서를 하였으며 결국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이용하여 조지서를 주살했다.
즉위
연산군은 즉위 후 즉위초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주민을 이주시키는 한편, 녹도(鹿島)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야인을 회유 또는 토벌하는 등 국방에 주력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빈민을 돕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등 여러 서적을 완성시켰으며 국방도 튼튼히 하였다.
연산군은 사창·상평창·진제창(賑濟倉)의 설치하여 빈민의 어려움을 덜어주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하였으며, 또한 《경상우도지도》, 《국조보감》, 《동국명가집》 등을 간행하였고, 《역대제왕시문잡저》, 《속국조보감》, 《여지승람》을 완성하는 등, 즉위 초에는 다소의 업적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즉위 직후 그는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외할머니 장흥군부인 신씨와 외삼촌 윤구를 석방한다. 즉위 이듬해부터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권시키는 일을 추진한다. 그러나 사림에서는 '사후 백년간 폐비 윤씨 문제는 논외에 부친다'는 선왕의 유지(성종의 유언)를 이유로 들며 폐비 복권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감정이 악화된 연산군은 사림파의 제거를 추진하였다.
정치개혁
즉위 초반의 연산군은 왜인과 야인의 입구(入寇)를 의식하여 평안도와 함경도의 방비를 강화하였고, 왜구의 약탈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비융사(備戎司, 비변사의 전신)를 설치하고 상설 회의 개최와 병기 개량 등을 추진하였다. 또한 평안도와 함경도의 성곽 개보수와 변경에로의 사민(徙民)의 이주 독려와 면세, 부역 면제 정책 등 변방이주를 장려하였다. 또한 정여창, 허침 등 세자시절 스승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즉위 초반에는 경연에 자주 참여하는 한편 선대부터 간행되던 《국조보감 國朝寶鑑》, 《여지승람 輿地勝覽》 등의 증보, 수정을 계속하도록 지시하였다.
무오사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이 사초(사관이 기록한 역사 기록)에 수록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계유정난을 비난한 것이라는 이극돈, 유자광의 참소에 따라 김일손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처형하거나 유배하고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부관참시하였다(→무오사화). 이후 이극돈, 유자광, 윤필상 등 훈구파 고관들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다. 국문장에서 김일손을 국문하자 김일손은 자신은 하늘에 한점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 하며 스승과 스승의 동료 문하생들을 모두 발설하였다.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하였다는 죄를 씌워 처형하고, 강겸(姜謙)·표연말(表沿沫)·홍한(洪澣)·정여창(鄭汝昌)·강경서·이수공(李守恭)·정승조(鄭承祖) 등은 난(亂)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유배보냈으며, 이종준(李宗準)·최부(崔溥)·이원·이주(李胄)·김굉필(金宏弼)·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姜伯珍)·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남곤(南袞)·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유배보냈다.
또한 김종직의 문인인 성희안, 유순정 역시 연좌하여 한직으로 좌천되는데 이들은 이때부터 연산군에게 원한을 품고 박원종의 쿠데타에 적극 동참하게 된다. 한편 어세겸(魚世謙)·이극돈(李克墩)·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생모 추숭 시도와 좌절
즉위 초부터 그는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권과 추숭에 대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성균관과 양사에 포진한 사림파 인사들은 사후 백년간 언급하지 말라는 성종의 유명을 내세워 연산군의 생모추숭 시도를 반대한다. 강하게 반발하던 사림의 태도에 연산군은 이들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 정계와 연산군과의 사이에는 감정적 갈등이 일어났다.
그는 사림파 관료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고 번거롭게 여겨 경연과 사헌부를 축소하는 한편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직도 혁파 또는 감원을 하였다.또한 기타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을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시켰다. 또한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 등 한성부의 일부 사찰은 연회장과 마굿간으로 바꾸어버렸다. 이에 본래부터 사림파 인사들을 싫어하거나 기피하던 연산군의 성품을 본 이극돈(李克墩), 임사홍 등 훈구파 재상들은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 확장 및 정쟁에 이용하려 한다.
갑자사화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년 음력 10월에 훈구파 내에서 궁중파와 부중파 간의 분란이 발생하자 이를 이용하여 어머니의 한을 풀고자 했다. 폐비 윤씨의 폐비 사태를 주도했던 성종의 두 후궁(귀인 엄씨, 귀인 정씨)을 비롯하여 당시의 관련자인 훈구파·사림파 대신들을 살아 있으면 처형하고 이미 사망했으면 부관참시했다. 이 일련의 사건이 갑자사화이다. 당시 사림파 일부는 성종의 유지를 주장해 폐비복위를 반대하였고, 임사홍 등 궁중파는 갑자사화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사림파를 비롯한 반대파에게 대대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연산군은 이들을 이용하여 사림파를 숙청한 뒤, 폐비 문제와 직결된 이극균, 윤필상, 성준, 김굉필 등 부중파 역시 숙청한다.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정창손, 정여창(鄭汝昌)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또 폐비 윤씨의 폐비 사태를 주도했던 두 후궁은 정씨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시켜 때려 죽이고, 그 시신으로 젓갈을 담그어 산야에 버리고 아무에게도 매장하지 말라고 명하기도 했다. 또 안양군과 봉안군은 유배를 보냈다가 이듬해 죽였고, 정씨 소생의 정혜옹주와 엄씨 소생의 공신옹주는 폐서인하고 유배했다(두 사람은 중종 즉위후 복권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인수대비(仁粹大妃)와도 크게 다투었고, 훗날 폐비 윤씨를 복위하는 문제로 재차 다투다가 당시 병으로 누워 있던 인수대비를 강하게 밀쳤고(들이받았다고도 한다), 그 후유증으로 인수대비는 사망했다.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초상 때에도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 또는 역월지제(易月之制),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삼년상 대신 25일상을 치름)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복수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사사하게 만든 성종의 두 후궁인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에게 곤장형을 내렸으며 그 집행을 그들의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에게 담당시켰다. 하지만 안양군과 봉안군은 정귀인과 엄귀인이 자신의 모친이라는 이유로 곤장을 때림에 있어서 사정을 봐주면서 때렸다. 이에 머리끝까지 화가난 연산군은 안양군과 봉안군에게서 몽둥이를 빼앗아서 정귀인과 엄귀인을 마구 폭행해서 숨을 끊어놓았다.
연산군은 그것도 모자라서 정귀인과 엄귀인이 사망한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연산군은 두 귀인에게 각각 1천번 이상의 몽둥이질을 하고 나서야 매질을 그쳤다. 그리고 정귀인과 엄귀인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서 젓갈로 담근 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뿌렸다.
위의 내용은 야사에서만 전하는 내용이다. 이후 안양군과 봉안군은 귀향을 보낸뒤 사사시켰다. 중종 실록을 살펴보면, 연산군이 자신의 유흥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과 사냥터를 조성할 목적으로 민가를 부수고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어 철거민들이 발생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연산군일기 제위 9년 11월 2일자 기사에 승지들에게 명한 것을 살펴보면, 궁 100척 이내에 민가가 있으면 불가한 것이 조선의 국법인 바 왕이 이 민가들을 철거하라 명했다.
이 때가 겨울인 것을 감안하여 민가를 철거당한 백성들에게 집터를 제공하고 큰집 중간집 작은집으로 등급을 나누어 무명 50필 30필 15필을 지급하라 명하였다. 그리고 다시 명을 내려 지금이 겨울임을 감안하여 봄이 될때까지 기다려서 철거하라 하였다. 불법 민가를 철거하는데 소정의 보상급을 지급하고 장차 다시 집을 세울 터까지 제공하는 것은 폭군의 증거라 하기 어렵다.
그해 음력 7월 20일에는 연산군을 비방하는 언문 투서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언문을 아는 자를 모조리 잡아들이고 언문 서적을 모두 태워 버리는 등 언문 사용을 금한다는 명을 내렸지만 이내 거두었고, 악보를 쓰고 책을 편찬할 때 훈민정음을 자주 사용하여 이를 계속 탄압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연산군은 언문 아는 사람을 잡아 일일이 필적으로 대조하고 언문책을 불사르고 사용을 금지했다.
그에 대해서는 연산군의 문화적 잘못이라는 평이 있다.더욱이 서총대(瑞蔥臺)라는 유흥장을 만들면서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고, 베를 무더기로 바치게 하여 즉 백성들의 노동력과 재산을 수탈하여 민심도 돌아서게 되었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었다 하여 한글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또 그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와 그 투서에서 연산군을 비방하는 자가 누구라고 지목하여 왕에게 알리라는 고변이 있었는데, 자신을 비방하는 글이 언문으로 쓰여졌다는 이유로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우게 했다.
1505년(연산군 11년) 음력 6월 9일 신료들이 처음으로 헌천 홍도 경문 위무(憲天弘道經文緯武)라는 존호를 올렸으나 자신에게는 과분하다고 물리친다. 그러나 마지못해 받는 듯 하면서 존호를 받아들인다.
음란 행위
채청사와 채홍사를 파견하여 사헌부 홍문관 성균관 등을 기생들이 있는 집단으로 바꾸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기생들은 고려 시대 때부터 가무악단이며 연산군과 교감을 나눈 여인은 광한선과 월하매 정도였다. 이는 반정 측에서 연산군을 깎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었던 것 같다.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범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박씨는 50대의 노인이었고, 연산군은 혈기왕성한 30대 초반의 나이였으므로 이 소문 역시 중종반정 이후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치세후반
연산군은 압반과 사헌부감찰 등을 동원하여 사치와 나태에 물들어있던 성균관과 사부학당의 유생들을 규찰, 감시하게 했고 또한 의정부의 정4품직인 사인, 검상, 이조와 병조의 낭관들의 관직에 문관과 무관을 번갈아가며 임명하게 함으로써 문신 관료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폐지했다. 이로써 문인 관료들 사이에 경쟁을 하게 했다.
1506년(연산군 12년) 8월 그는 정무를 보좌할 때 영의정이나 삼정승이라고 해도 직함 뒤에 존칭을 생략하게 했으며, 문묘에서 공자에게 작헌례를 할 때 그의 생전의 직분은 신하였다며 재배만 하게 했다. 공자묘에 절하지 않겠다는 그의 선언은 성리학사회인 조선에 큰 화제가 되었다. 연산군은 유교의 복잡한 의례를 배격하고 간소하고 실질적인 절차만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산군의 일련의 개혁 조치는 사림은 물론 그의 측근들에게까지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는 조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로 비쳐졌다. 이는 9월에 발생한 중종 반정에 더욱 명분을 실어주는 계기로 작용한다.
폐위와 유배생활
1506년 음력 9월 2일 성희안, 유순정, 박원종, 신윤무 등은 사전에 준비한 사병들로 거병하여, 신수근,임사홍등 연산군의 측근들을 살해하고 궁을 장악하여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연산군은 폐위되어 민가에 숨어있다가 체포되어 경기도 김포군 교동(喬桐)에 추방되었다. 이때 장녹수 등 그의 후궁들은 한성부 종로, 남대문 등에서 투석사형당하였으며 연산군의 어린 아들들도 반정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정현왕후는 처음에 주저하는 듯 하다가 바로 반정군의 요청을 수용한다. 음력 9월 2일 새벽, 궁궐의 방화를 틈타 민간복으로 변복한뒤 말을 타고 궁궐을 빠져나온 연산군은 한성부 근처의 한 민가에 숨었으나 그를 추격한 박원종의 사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즉시 압송되어 폐위당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뒤 유배지의 별감과 상궁들은 그를 조롱하였으나 그는 이를 묵묵히 참고 인내하였다. 그러나 유배 직후 열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고생하게 된다. 뒤이어 강화도 근처 교동도로 배소가 옮겨진다.
최후
연산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그를 독살하려는 시도들이 셀 수 없이 많았으나 한때 그를 동정했던 당시 강화 부사의 노력으로 독살을 모면했다.
함께 유배되었던 그의 왕자들도 사사, 처형당했다. 중종은 조카들의 나이가 어리고 형세가 고단한 점을 들어 처벌을 반대했지만, 대신들의 강력한 요청을 수용하고 말았다. 공신들은 훗날 누군가 이들 왕자들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 결집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교동도로 이배되었다가, 강화군 교동도에 유배된 지 2개월 뒤인 그해 음력 11월에 교동도에서 역질을 앓다가 11월 6일 역질, 화병 등의 후유증으로 병사하였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부인인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한다. 사망후 민중에서는 독살설이 퍼졌다고 한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29세였다.
장례와 제사문제
1516년(중종 11)부터 연산군의 제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사망 직후부터 제사는 부인인 거창군부인 신씨가 지내고 있었다. 중종은 연산군의 제사를 보통 왕자군보다는 상향해서 지내야 된다는 견해를 피력했는데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한때 국왕을 지낸 사람이고, 중종과는 형제가 되는 지친(至親)이었다. 게다가 조선 왕실은 고려 국왕의 제사까지 이어지게 했으므로, 명분이나 인정으로 볼 때 연산군의 제사가 끊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신분은 왕자군의 신분으로 하되 제사는 그보다 상향해서 치르게 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관례대로 종실 가운데 한 사람을 연산군의 후사로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려 했지만 중종은 연산군의 후사가 문제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결국 중종은 결정을 미루었고, 사관은 '상(중종)이 폐주(연산군)의 후사가 없는 것을 슬퍼했으면, 동기간의 두터운 정으로 종실 사람을 선택해 후사를 이어가게 하고, 부박한 논의에 저지당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중종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비판했다.
1537년(중종 32) 4월에 거창군부인 신씨가 사망했다. 신씨의 장례는 왕자군 부인의 장례보다는 격이 높고 왕비 부모님의 장례보다는 낮은 수준으로 거행했다. 다시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은 외손봉사(外孫奉祀)로 결정되었다. 연산군과 신씨 사이에는 외동딸 휘신공주 이수억이 있었다. 공주는 처음 휘순공주로 봉해졌다가 휘신공주로 작호가 변경되었다. 1503년(연산군 9) 휘신공주는 부왕 생존시 구문경에게 출가하여 아들 구엄을 두었다.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봉사를 하면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오래도록 왕실의 외척으로 예우를 받았고, 범죄를 저질러도 연산군의 제사를 끊어지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감형의 혜택을 받는다. 그러나 구엄에게도 아들이 없었고 구엄이 사망한 후 그의 외손인 이안눌이 연산군의 제사를 계승했다. 이안눌은 구엄의 친외손자는 아니었는데 이동의 아들로 태어나 아저씨뻘 되는 이필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이필의 부인이 바로 구엄의 딸이었다. 연산군의 제사는 부인 신씨가 시작하여 외손자인 구엄에게 이어졌고, 다시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과 그의 후예들에게로 이어졌다.
사후
사망 직후 묘소는 강화도 현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1512년 12월에 강화도에 홍수가 일어나 묘소가 침식되었고, 신씨는 이 참에 남편의 묘소를 양주 해촌(海村)으로 이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군부인 신씨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1513년 3월에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이장되었으며, 왕자군의 예우대로 장사되었다. 묘소에는 '연산군지묘'라는 석물 이외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묘소의 관리는 현지의 관리가 담당했다.훗날 폐위된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폐주의 한 사람으로 연산군은 성종의 제2계비인 폐비 윤씨가 폐위되기 전에 태어나 적자의 신분으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폐위 후 후궁 소생의 왕자의 신분인 군으로 강등당했다.
조선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 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의 재위기간의 실록 역시 실록이 아닌 《연산군일기》로 통칭되었다.조선시대 내내 폭군과 패륜아의 전형으로 지탄받아오다가 1970년대 이후에야 재평가 여론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논란과 의혹
흥청망청의 기원
그는 각도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였으며,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성균관을 놀이터로 삼고 한성부내 각 사찰을 연회장, 유흥장으로 만드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이때 선발해들인 흥청들과 그들의 식비, 유흥비 등으로 국가 정사가 피폐해진다 하여 흥청망국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말은 곧 흥청망청의 어원이 되었다.또한 폐비 윤씨의 복위를 강하게 반발하는 사림파에 대한 반발로 치세 후반에는 경연 등을 없애 학문을 중단하였고, 사간원과 사헌부를 폐지하여 언로(言路)를 막기도 했다.
고문과 가혹 행위
연산군은 고문행위에 대한 전례를 찾아서 악형을 가하여 폭군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그의 치세 중에 행해진 고문들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압슬, 포락(炮烙, 단근질하기), 물구나무 후 물고문, 착흉(斮胸, 가슴을 구타), 주리 틀기, 불판을 걷게 하기, 능지처사, 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등의 형벌이 있었다. 또한 사형자 혹은 이미 죽은자의 시신을 갈아서 바람에 날려버리는 쇄골표풍(碎骨瓢風) 등도 당대에 행해진 악형이었다. 특히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등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를 희생시킨 점 때문에 사림파의 집권 이후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1910년까지 폭군의 전형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폐비 윤씨 사사 사건 당시
폐비 윤씨의 사사 당시 약사발을 들고갔던 우부승지 이세좌가 집에 돌아와 이를 말하자 이세좌의 부인은 우리 집안에 남자가 하나도 남아나지 않겠구나 하며 한탄하였다. 부인의 예언대로 연산군 치세 중 그의 일가들이 연좌되어 처형당한다.
25일장과 패륜 논란
1504년 그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는 단상제(短喪制)로 할머니 인수대비의 상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연산군은 갑자사화 전부터 폐비 윤씨를 사사하는 문제를 두고 그를 강하게 대했던 할머니 인수대비를 추궁했고, 인수대비와 언쟁 중 조모의 가슴을 상 또는 머리로 들이받았다. 병을 앓던 인수대비는 그 후유증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였다. 그런데 연산군은 할머니인 인수대비에 대한 3년상 대신 25일로 장례를 치뤘다.
인수대비의 초상 중 그는 하루를 1개월로 계산하여 25일만에 장례를 마쳤는데 이를 역월지제라 한다. 그의 인수대비 25일장은 인조의 소현세자 7일상과 함께 조선이 망할 때까지 두고두고 성리학자와 선비들 사이에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연산군의 외모
이덕형 의 수필집 죽창한화에서 연산군은 흰 피부에 키가 크고, 수염이 적고, 눈은 충혈되었다고 적고 있다. 또 연산군 시절에 임금 모독죄로 구속된 김수명은 '임금의 허리와 몸이 가늘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