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건국, 단군, 위만조선
고조선의 건국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한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요임금 즉위 50년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일연은 요임금은 무진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즉위 50년은 정사년이 되므로 정확한 시기가 의심스럽다는 주석을 함께 실었다.
《동국통감》〈외기〉에는 “동방은 애초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모셔 단군이라 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 무진년이다.
처음엔 평양에 도읍하였고 나중엔 백악으로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왕운기》 역시 건국 연도를 무진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에도 단군의 건국을 다루고 있으나 즉위 연도를 밝히고 있지는 않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단군 조선의 설립을 기원전 2333년으로 보고 있고 현행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들 역시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2333년을 단군 조선의 건국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부터 시점을 잡아도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역사서의 건국 시점에 대한 서술이 실재와 부합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2007년 교육부는 최근의 청동기 유물 발굴 결과 《삼국유사》의 건국 기록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고 보고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는 기술을 ' ~ 건국하였다'로 바꾸기로 한 바 있다.기원전 2333년이라는 건국 연도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한 것으로 일연 스스로가 주석에 이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현대 사학계에서는 실제 고조선의 건국 연대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서술하고 있다.대한민국의 역사학자 박광용은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단군을 실제 인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5차 교육과정 개편을 위한 〈교과서개편준거안〉 작성 과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였다.
1987년 확정된 이 준거안에서는 상고사에 관한 지침으로 단군을 역사적 사실로서 반영토록 하였고, 고조선은 중심지가 계속 이동함에 따라 영역도 바뀌는 ‘이동국가’가 아니라 확정된 넓은 강역을 유지하는 ‘영역국가’로 기술하며 한사군의 존재는 본문에서 다루지 않고 각주로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 결정 과정에는 정치권 및 언론계의 압력이 심하게 작용한 것으로 현대적 학문에 입각한 결정이 아니라 전통적 상식에 입각한 결정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고조선의 건국을 다루는 단군 신화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명을 가진 외래 세력과 웅녀로 대표되는 토착 세력의 결합을 통해 건국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으로는 조선으로 지칭되는 불특정한 소규모 지역 집단의 집합체가 초기 고조선의 사회모습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박광용은 단군 신화가 우리 역사의 귀중한 사료임에는 틀림없으나 고조선의 지배층이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단군을 시조신으로 모신 이래 구전되어 오면서 수 많은 변형이 있었던 불확실한 사료로서,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불확실한 신화적 사실을 섣불리 실재화하거나 신비화 할 경우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국수주의자 또는 복고주의자를 대량 생산할 위험성이 상존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문동석은 청동기 시대에 시작된 고조선을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24세기로 올려 잡는 것은 민족의 기원 올려잡으려는 의도가 드러나 있다고 평가하였다.
고조선이 최초로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7세기로, 이 무렵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관자(管子)》에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에 성립된 기록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연나라의 동쪽, 바다의 북쪽에 있다고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특정한 국가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요동지방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 집단을 통칭한 것으로 본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 집단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이 큰 세력으로 통합되면서 고조선이라는 고대 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단군신화는 고조선을 통합한 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중반에는 연나라와 관련된 사료인 《전국책》에서 조선이 연나라 동쪽의 유력한 세력으로 언급된다. 적어도 이 무렵에 고조선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여 전국 시대(戰國時代) 중국의 국가와 대등한 외교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말에는 연나라와 분쟁이 일어나 고조선 측이 선제 공격을 꾀하였다가 중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중국은 종주국인 주나라가 쇠퇴하고 각 지의 제후들이 왕을 칭하고 있었는데 연나라가 기원전 323년에 왕을 칭하자 고조선의 군주도 ‘왕’이라 칭했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연나라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고조선은 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고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사료적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을 받았던 위략에 따르면 연나라의 장수 진개(秦開)의 침입으로 고조선은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겼으며,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하게 되었고, 연나라가 고조선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에는 요동군(遼東郡)이 설치되었고 장성도 쌓았다고 한다.
이때 고조선이 상실하였다는 지역은 랴오닝 성 일대로 보이며,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패배로 고조선이 요동 지방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이를 기록한 역사서 위략이 위서(僞書)이며 사기, 염철론 등의 사서의 내용에 따라 위략에서 연이 토벌한 대상은 고조선이 아니라 '동호(東胡)'라 주장하기도 한다.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중국을 통일하고 기원전 214년에 만리장성을 건설하자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복속하였다. 그러나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한 것으로 보아 표면적인 복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왕의 뒤를 이은 준왕(準王) 시기 진나라에 내란이 발생하고 뒤이어 유방과 항우가 전쟁을 벌이는 등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중국 유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이주하였다. 기원전 202년에 중국을 통일한 전한은 연·진 시기의 장성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포기하고 요동의 옛 장성을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기원전 195년에 한나라가 임명한 제후인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나라 지역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위만(衛滿)은 이들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는데, 상투를 틀고 고조선의 복색을 하였다고 한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기원전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조선을 건국한 위만의 출신에 대하여 여러 주장이 있는데, 과거 연나라가 정복한 고조선 지역의 주민, 즉 고조선 출신이라는 주장과 연나라 출신의 유력자라는 주장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위만의 출신을 연나라(중국인)이며 이를 중국의 식민 지배라 주장하였고 광복 후 일부 학자들은 위만을 고조선의 유민이라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현재 대한민국의 학계에서는 위만이 고조선의 국호와 국체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사실을 들어 위만의 출신이 어디이든 관계가 없다고 본다.
위만은 유이민 집단과 토착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 하였다.(위만은 중국에서 철을 가져와 고조선에 널리 전파했다) 중국 문물(대표적인 문물 '철')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임둔 등의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나라는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위만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는 누선장군 양복과 순체 등에게 명하여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이끌고 각각 위만조선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위산을 사신으로 보내 다시 외교적 절충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결국 전쟁이 재개되었는데,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위만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진국으로 갔다. 또한 조선상 노인(朝鮮相 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 삼(尼谿相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군·임둔군·현도군·진번군의 4군을 설치하였고 많은 고조선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였다.이 시기 고조선 지역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