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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 조선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창설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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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 조선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창설부대

 

 

훈련도감(訓鍊都監)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이다.

5군영 중에서 가장 먼저 창설되어 그 중심을 차지하였다. 훈국(訓局)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

 

역사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전통적 진관체제(鎭管體制)가 무너지자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오는 〈절강병법(浙江兵法)〉에 의거해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선조 26년)

임시 기구로 설치되었다.

 

정병(精兵) 양성과 기민(飢民) 구제 임무를 맡아 오다가 1594년부터 수도 방위·국왕 호위 임무를 겸하여 종래 오위가 담당

하던 기능을 대신하였다.

 

이어서 5군영 체제가 갖추어지자 어영청·금위영(禁衛營)과 함께 삼군문(三軍門)으로 불리면서 궁성과 한양을 방위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핵심에 위치하였다.

 

조직은 1593년 음력 11월 군사를 좌영(左營)·우영(右營)으로 나눈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음력 2월 속오법(束伍法)에 따른

군사 조직 체계를 갖추었다.

 

군사는 화포와 총기를 사용하는 포수(砲手), 활을 사용하는 사수(射手), 칼과 창을 사용하는 살수(殺手)의 삼수병(三手兵 :

삼수군)으로 조직되었고, 그 수가 약 1000명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종래 조선 군인은 양인 개병제(皆兵制)를 원칙으로 하는 군역에 따라 충당되었으나, 삼수군은 1개월에 쌀 6말의 급료를 받는

일종의 직업 군인으로 모집되어 한양 인근에 주거하며 교대 없이 근무한 차이가 있다.

 

처음에는 1천여 명의 규모였고 병자호란 직전에는 5천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점차 상설 기구가 되었고,

1746년(영조 22년)에 법제화되었다.

 

이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조총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존의 활과 창으로 무장한 부대 외에 조총으로 무장한 부대를

만들었다.

 

1881년(고종 18) 군제 개혁 때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이 조직되자 훈련도감은 무위영에 합쳐졌다. 이듬해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잠시 재집권하면서 다시 부활했으나, 임오군란이 청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1882년 10월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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