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3·1 운동에 맞추어 민족대표 33인이 당시 일제 강점 하에 있던 조선의 독립을 국내외에
선언한 글이다.
독립선언서 낭독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는데, 이는 자신들이 태화관에 모여있으니
연행해 가라는 뜻이었다.
60여 명의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저녁무렵에 길선주 등 태화당에 도착하지 못한 나머지 4인도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1.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2. 반만 년이나 이어 온 우리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서 이 선언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민족의 한결 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니, 이 독립 선언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민족 자결주의에로 옮아 가는 시대의 큰 형세이며,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갈 권리를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직임이므로,
천하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이 독립 선언을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 기미독립선언서 처음 부분 (현대어역)
한편 오후 2시에 태화관과 300미터 떨어진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
지 않아 한동안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후 3시경에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 학생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그리고 한위건이 민족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거사시간에 기약하지 않고 모인 학생이 천여명이었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소리가 울려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와 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이 때, 성안과 지방의 백성들도 합세하여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종로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하였다.
대한문에 이르른 군중을 이끌던 사람이 덕수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시위행진은 서울을 8개구
로 나누어 길을 가면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일본군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조선독립만세", "조선 독립정부를 수립하라"
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계속 진행하여 서대문을 돌아 태평로를 지나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다.
이때 어느 학생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대한독립' 4자를 써서 앞에 들고 군중을 인도하니 미국영사는
문을 열어 환영하고 깊은 동의를 표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의 주지를 연설하고, 종로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벌이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
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6시가 되어서 자진해산하였다.
다음날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하였는데 그 숫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