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논란과 의혹, 정치적, 종교적 목적의 악용 논란
유관순(柳寬順, 류관순, 1902년 12월 16일 ~ 1920년 9월 2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에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을 천안에서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1916년 미국인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초등부 3학년에 편입하고, 1919년에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하였다.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일제의 교도소 내 가혹행위로 인해 1920년 9월 28일에 사망했다.
2013년 주일대사관에서 발견되어 국가기록원이 이관받아 11월 19일에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유관순, 옥중에서 타살(打殺)"로
기재되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에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생가가 복원되어 1991년에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유관순 열사 유적과 천안종합운동장 내 '유관순체육관'은 유관순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해방 후 박인덕 등에 의해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부 개신교 세력과 박인덕 등이 자신들의 친일 의혹을 덮기 위
한 불순한 의도로 개신교계 학교인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를 부각시켰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초기 활동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류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3남 1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1905년 집이 근처 탑원리로 이사했다가 1907년 무렵 다시 가족을 따라 용두리로 돌아왔다.
이화학당 재학과 만세 운동
1916년에 개신교계 감리교회 충청남도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엘리스 샤프, Elice Shape)의 추천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하고, 1919년 이화학당 고등부로 진학하였다.
교비생은 학비를 면제받고 졸업 후에 교사로 일하는 학생이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이었던 유관순은 만세시위에 참가하였고, 연이어 3월 5일의 서울 만세시위
에도 참가하였다.
그 뒤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임시휴교령을 내려 이화학당이 휴교하자 3월 8일 열차편으로 천안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 시위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천안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조인원(趙仁元)· 김구응(金球應,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등이 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와 유림계를 규합하여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並川)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군중을 모았
으며, 당일 모인 수천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맹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아우내 만세 운동 가담과 체포1919년 3월 당시 천안군 목천면에서는 이종성(李鍾成) 등의 주동으로 3.1 만세 운동에 호응하는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하지 못했다.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의 주선으로 3월 9일 밤 교회 예배가 끝난 뒤 마을 속장 조인원(趙仁元), 지역 유지 이백하(李伯夏) 등 20
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언니와 함께 경성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어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안성·목천·연기·청주·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
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의 한 사람이 되어 다른 연락원들과 함께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상대로 시위운동 참여를
설득했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유관순은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유관순의 부모 유중권과 이소제는 시위 현장에서 조선총독부 헌병들이 군중을 향해 쏜 총에 맞아 살해되었고, 속장 조인원 등
도 총격으로 부상당했다.
아우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일제 헌병에 붙잡힌 유관순은 미성년자인 점을 감안하여 범죄를 시인하고 수사에 협조하면 선처하
겠다는 제안을 거절하였고, 이후 고문을 받았으나 협력자와 시위 가담자를 발설하지 않았다.
투옥과 최후
유관순은 천안경찰서 일본헌병대에 투옥되었다가 곧 공주경찰서 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공주지방법원에서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재판에서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 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유관순은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
고, 같은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후 상고를 포기하였다.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 재판 당시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항의하면서, 조선총독부 법률은 부당한 법이며 그에 따라 일본 법관
에 의해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역설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왜 제 나라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는 것이 죄가 되느냐?
왜 평화적으로 아무런 무기를 갖지 않고 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총질을 해대어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하여 무고한 수많은 목숨을 저리도 무참하게 빼앗을 수 있느냐?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게 있는 것이 아니냐?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으며,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이 지옥같은 식민지 지배에 죄
가 있는 것이 아니냐?
자유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며,누구도 이것을 빼앗을 수는 없다.
무슨 권리로 신성한 인간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느냐?
나는 죄인이 아니오. 그리고 나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순간까지 죽는 한이 있더라고 만세를 부를 것이오.
나는 대한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당신들이 나를 죄인으로 몰고 있을 뿐이오.
나는 도둑을 몰아내려 했을 뿐이오. 당신들이 남의 나라를 빼앗았는데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라고 말씀하셨다.
유관순의 선고형에 대해서는 해방 직후 전영택 등이 징역 7년설을 거론했으나, 최근에 '병천·동면 지역 형사사건부'이 발견되
어 공주지방 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음이 확인되었다.
1920년 4월 28일에 영친왕이 일본 왕족 이방자와 결혼하자 특사로 형이 1년6개월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에도 옥안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구타를 당해 형기를 3개
월남긴 1920년 9월 28일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2013년 11월에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유관순, 옥중에서 타살(打殺)"로 기재되어 있다.
국가기록원이 주일대사관에서 이관받아 11월 19일에 공개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와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에는 3·1
운동 당시 애국 인사들의 순국 정황과 관동대학살 당시 참상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주일대사관 청사 신축에 따른 이사 과정에서 발견된 이들 명부에는 3·1운동 피살자 중 630명과 관동대지진 피살자 중 290명에
관하여 인적사항과 사망 당시의 정황 등이 기재되어 있다.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순국 당시 주소는 천안군 동면 용두리, 순국 장소는 서대문형무소로 나온다.
순국 상황 난에는 "3·1독립 운동만세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被檢)돼 옥중에서 타살(打殺) 당함"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아우네 만세 운동 당일의 희생자도 기재되어 있는데, 유 열사 부친인 유중권 열사의 기록이 가장 먼저 나온다.
순국 경위는 "3·1운동 독립만세로 인하여 총살당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시는 기미년(己未年·1919년) 3월 1일, 장소는 천안군 병천면 병천리이다.
이는 1987년에 작성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한다.
보훈처에 따르면 공훈록은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의 만세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을
추격하며 발포하고 칼로 찔렀다고 전하고 있다.
또, 이 자료에는 유중권 열사의 바로 옆에 성명이 "李氏"라고 표기된 여성이 등장한다.
주소·순국장소·순국상황 난에 유중권 열사와 같다는 기호(〃)로 표기돼 있어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소제 열사로 추
정되고 있는데, 유중권 열사와 이씨를 포함해 20명이 같은 장소·날짜·상황에서 순국했다는 자료의 내용은 1987년에 작성된 독립
유공자 공훈록에서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 열사와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는 기록과 같다.
일단, 국가기록원은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의 이씨를 미확인자로 분류했다.
사후
유관순이 사망한 이틀 뒤, 이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와 월터 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
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이화학당의 외국인 교직원들이 유관순의 옥중사망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서대문형무소는 마지
못해 월터 교장서리에게 시체를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장례식이 거행되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존재는 잊혀졌다. 유관순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36년에 택지 조성 등을 목적으로 이태원 공동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무연고묘로 처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광복 후 충청남도와 천안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다.
한편 1946년부터는 이화여고 교장이었던 신봉조와 박인덕 등 이화학당 출신 인사들에 의해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이 즈음, 서대문형무소로부터 유관순의 인수한 이들이 석유상자 속에 든 유관순의 시체를 열어보니 토막으로 참살되었다는
소문 등이 퍼뜨려졌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후일 건국훈장 국민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시신을 잃어버려 1989년 10월 12일 그의 고향 근처에 가묘인 초혼묘를 세웠다.
논란과 의혹
형량에 대한 중언부언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은 유관순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절차는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3심제도로 운영되었으며, 유관순의 판결문은 징역 3년을 선고한 경성복심법
원의 판결문만 남아 있어 1심 형량은 설왕설래했었다.
유관순과 1년 가까이 함께 복역한 어윤희는 '유관순 열사가 6년형을 받았다'고 말한 반면, 조병옥의 동생 조병호는 '부친(조인원)
이 유관순 열사와 함께 7년형을 받았다'고 회고하는 등 관련자들의 증언도 일치하지 않았다.
2007년 2월 26일 병천·동면계 형사사건부 발굴로 유관순의 1심 재판형량은 '징역 5년'임이 확인되었다.
정치적, 종교적 목적의 악용 논란
유관순 사후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 또는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덮기 위한 일부 기독교인들에 의해 과도하게 띄워졌다는
견해도 있다.
반기독교운동가이자 종교권력감시시민연대 대표인 김상구는 유관순이 사후 박인덕, 전영택, 일부 기독교인들의 선전도구로 이
용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의 유관순 기록과 당시 언론 보도 등을 근거로 유관순 열사는 박인덕 등 친일 경력자들이 해방 후 자신의 전
력을 덮고 개신교 선교 전략에 이용하는 도구로 만들어낸 영웅이라고 주장하면서, 2011년에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해피스토
리, 2011)라는 책을 통해 유관순을 악용한 일부 개신교 세력에 대해 폭로하고 유관순은 개신교계의 친일 전력을 덮어주는 동시
에 선교 전략에 활용되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이용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이화학당 출신 인사의 친일행적 은폐 의혹
박인덕 등은 일제 강점기 말기 친일 행적을 숨기기 위해 유관순을 미화, 신화화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있다.
기념사업을 주도한 박인덕이 자신의 일제말 친일행적을 유관순의 신화화를 통해 덮어버리려 했다는 것이다.
유관순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해방후 박인덕의 주도로 기념사업이 추진되면서부터였다.
유관순이 의도적으로 띄워졌다는 견해도 있다.
유관순 열사가 해방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해방 후, 친일 혐의자인 박인덕과 전영택이 한국판 잔다르크와 독실한 기독
교 신자 등의 이미지를 씌워 인위적 영웅을 만들었다는 의혹도 있다.
그리고 이화여전 출신 친일 인사들의 친일 행적을 은폐하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토막살인 루머 논란
조선총독부 경찰에 의해 토막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이 소문의 진위 여부는 현재까지 밝혀진 것이 없다.
일제에 의해 토막 살해당했다는 등의 ‘유관순 신화’가 만들어진 것은 박인덕이 그를 미화하기 시작했던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사인은 방광 파열 등 고문 후유증이었다.
유관순 신격화 배경
1946년 이화여고 교장이었던 신봉조와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은 이화학당을 알릴 인물을 찾았다.
당시 이화학당의 후신인 이화여고의 교장으로 있던 신봉조가 동문 박인덕에게 ‘이화 출신 중에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하자 박인덕이 3·1 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하면서, 두 사람은 유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구성하였다.
많은 항일 학생운동가들 중에서 유독 유관순이 선택된 배경에는 이들이 자신의 친일행위를 덮으려는 목적이었다는 의혹이 있다.
신봉조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을 하면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하여 조선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서며 일제 말기에 전형적인 친일파 노릇을 했다.
박인덕도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엘리트였지만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그들은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죄과와 친일경력을 가릴 방패막이로 삼으려
했는데, 이를 위해 그들이 선택한 애국열사가 유관순이었다.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박인덕과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은 유관순을 백년전쟁 때 잉글랜드에 몰려 수세에 처해 있던 프랑스를 구한 신화
적인 여성영웅인 잔 다르크에 비유하였다.
유관순을 잔다르크에 비유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 존재로 각인시켰다.
3·1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는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대략 7천500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