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 전재산을 처분하여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이회영(李會榮, 1867년 음력 3월 17일(양력 4월 21일) ~ 1932년 11월 17일)은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한국의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장훈학교,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신민회의 창립 멤버였고,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으며 일가 6형제와 함께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하였으며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1931년 항일구국연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1931년 9월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과 일본 관련 시설의 파괴, 암살을 지휘하였으나 1932년 11월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고려, 조선의 양반가 출신으로 고려시대의 재상 익재 이제현과, 조선 선조조의 정승 오성 이항복의 후손이었다. 아호는 우당(友堂). 종교는 감리교로서, 7형제 중 넷째 아들이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해공 신익희와는 사돈간이며, 정치인 이종찬, 이종걸은 그의 손자였다.
출생과 가계 배경
우당 이회영은 1867년 음력 3월 17일 한성부의 저동(苧洞)에서 이유승과 동래정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성부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 1835~1906)이다. 7형제 중 넷째 아들로서. 위로는 세 형인 건영, 석영, 철영이 있었고, 아래로는 동생인 시영과 여동생 2명이 있었고, 이복 동생으로는 소영, 호영이 태어났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은 바로 밑의 동생이었다.개방적이고 호탕한 성격이었으며 일찍부터 개화 사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개방적인 성격이어서 집안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거나, 나아가 남의 집 종들에게 높임말을 쓰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회영의 집안은 경주 이씨로 그의 가계는 신라, 고려와 조선에서 대대로 문무관료를 배출한 양반 가문이었다. 신라의 개국공신 이알평의 후손이자 통일신라 소판 이거명의 34대손이었다. 이항복의 후손으로, 조선 선조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이었다. 소론의 지도자 이광좌는 그의 6대 방조(傍祖)였고, 이시영의 7대조 이세필(李世弼)은 형조참판이었고, 6대조 이태좌(李台佐)는 소론의 중신이자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5대조 이종성(李宗城)은 의정부영의정을 지냈고, 노론일색의 조정에서 사도세자의 몇안되는 후견인이기도 했다. 외교관으로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을 지낸 당대 정치거물이며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로 변절한 이하영(李夏榮), 국문학자 이준영(李準榮) 형제는 이시영의 12촌 종형이었다. 이하영·이준영 형제의 아버지인 증 내부대신(贈內部大臣) 이유수(李裕脩)는 그의 아버지 이유승과 10촌 종형제간이었다. 외가 역시 벌족으로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중종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의 후손으로,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鄭順朝)의 딸이었다. 당색으로는 소론가문이었지만, 아버지 이유승은 정치색을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관직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여동생은 동아일보의 기자와 상해 임시정부의 복무원을 지낸 평산 신씨 신재희에게 시집갔는데, 신재희는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해공 신익희의 여섯째 형이자 동복 형이었다.
결혼과 개화사상
1896년(고종 32년) 항일 의병의 자금조달을 위하여 경기도 개성부 인근 풍덕(豊德) 지방에 삼포농장(蔘圃農場)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농장의 수익금으로 의병들의 자금을 후원하였다. 그 뒤 이회영은 결혼식을 교회에서 신식으로 올렸고, 여성의 재가를 꺼리는 당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잃은 자신의 누이 동생은 거짓으로 부고를 낸 뒤 다시 결혼시켰다. 그 뒤 1906년 아버지 이유승이 사망하자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면천, 해방시켰다. 양반가의 자제로 유년기에 한학을 배웠지만 개화사상을 접하면서 그는 본래의 유교사상에서 기독교사상(감리교)으로 개종
한다. 1906년 이상설, 여준(呂準), 장유순(張裕淳), 이동녕(李東寧), 유완무(柳完懋) 등과 만주에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기지 설치계획을 수립한 후 만주 간도의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는데 참여하였다.
그는 1885년에 달성 서씨와 결혼하였으나 그녀는 1907년 1월 중순에 사망하였고, 1908년 10월 20일 이은숙과 상동 교회에서 재혼했다. 먼 족친인 이상설(李相卨)과 절친했던 그는 그 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계몽, 강연 등의 활동을 하였다. 독립협회 활동 당시 그는 여준(呂準)·이강연(李康演)·윤치호(尹致昊)·남궁억(南宮檍)·이상재(李商在) 등의 인사들을 만나 접촉하였다.
독립협회에 참가하고 장훈학교를 설립하는 등 계몽 운동을 벌였으며, 장훈학교의 교사 외에 공옥학교의 학감으로도 초빙되었다. 공옥학교의 학감으로 있을 때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조정의 고관이었던 이상설(李相卨)과 당시 대한제국 외무부 교섭국장인 친동생 이시영(李始榮)등과 함께 을사 보호 조약 철회, 무효화운동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바로 나인영(羅寅永), 기산도(奇山度) 등과 함께 조약체결에 가담한 박제순 등 을사오적의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그는 안창호, 이갑, 전덕기, 양기탁, 윤치호, 안태국, 이상재, 김규식, 이동녕, 김홍량, 이동휘, 신채호, 최광옥, 이시영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조직 신민회(新民會)를 결성, 조직하여 신민회 중앙위원에 취임하고 교육, 계몽, 강연 활동을 하였다. 또한 그는 신민회의 정치·경제·교육·문화 분야 등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신민회를 탄압했고, 신민회 회원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개화 이전에 노비 해방, 적서(嫡庶) 타파, 여성의 부당한 인습에 의한 권리 박탈에 반대, 개가와 재혼을 장려하였고,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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