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 전투, 계백 가족들을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나서다.
황산벌 전투는 660년 8월 20일 (음력 7월 9일) 황산벌(오늘날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및 신암리 일대)에서 백제군
과 신라군 사이에 일어났던 전투이다.
삼국사기 계백 열전, 삼국유사 태종무열왕조 등에 전투 내용이 나온다.
배경
백제가 신라를 자주 공격하자,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나,당 간의 동맹을 맺었다.
660년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 5만 명과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13만, 합하여 18만의 군사가 백제로 쳐들어갔다.
당나라는 수로를 이용해 백제의 백강 쪽으로 쳐들어갔고, 신라군은 육로를 이용하여 백제의 탄현쪽으로 쳐들어갔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의자왕은 대소신료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빠르게 대처해야 한다는 편과 지연작전을 써야 한다는 편이 나눠 다투는 동안 연합군은 요충지인 백강(白江)과 탄현(炭峴)
을 넘어 왔다.
이에 의자왕은 급히 계백을 황산벌로 보내 신라군과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5천 정예병을 뽑으면서 "한 나라의 군사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상대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처자식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서 모욕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스스로 가족들을 죽이고 전열을 다졌다.
전투
양력 8월 20일(음력 7월 9일)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은 이미 산직리 산성, 모촌리 산성, 황령 산성 3곳에
진영을 두고 기다렸다.
당시 달솔 계백은 좌평 충상, 달솔 상영과 함께 백제군을 지휘하였다.
이때 계백은 가족들을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나섰다.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옛 월왕 구천은 5천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용기를 다하여 싸워 국은에 보답하자"며 병사들을 독려했고, 과연 백제군은 사기가 올라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격파
하였다.
이에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을 전장에 투입하니, 반굴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반굴이 죽자 김유신의 조카인 좌장군 김품일은 16세의 아들 관창(官昌)을 시켜 선봉에 서게 하였다.
관창을 붙잡은 계백은 관창의 나이가 어린 것을 보며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랴!"라 탄식하며 돌려보냈다.
신라군으로 돌아간 관창은 품일에게 간단한 인사만 한 후 또다시 백제군에 쳐들어 갔다.
결국 계백은 관창을 잡아 목을 베었다.
관창의 죽음에 신라군은 죽을 각오로 덤비니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부하들과 함께 계백은 죽었다.
전투 결과
이때 백제군은 모두 전멸한 것이 아니라 일부 좌평 충상, 달솔 상영 등 20명이 살아남아 신라의 포로로 잡혔다.
황산벌 전투가 있던 날 소정방의 당군은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신라군과 합류하였다.
당시 소정방은 김유신에게 약속 기일이 늦은 것을 문제삼아 독군 김문영(金文穎)을 참수하려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노하여 "황산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기일이 늦은 것만 책망하니, 나는 죄없이 모욕을 당할 수 없다.
먼저 당군과 결전을 치른 후 백제를 공략하겠다."라며 군문에 나서니 소정방은 김문영을 풀어주었다.
이후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되어, 사비성 공방전을 치르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패배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백제군의 저항은 계속되어 20여 성이 저항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태종무열왕이 친정하여 이례성(尒禮城)을 치니 저항군은 항복하였다.
11월이 되어 전공을 논할 시 태종무열왕은 항복한 충상, 상영 등을 최대한 예우해주는 차원에서 왕족을 제외한 가장 높은
신분인 6두품과 그에 걸맞은 관직인 일길찬의 관직을 주고, 기타 백제인들에게도 백제 시절의 서열을 고려하여 그에 걸맞
은 두품과 관직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흑치상지 등의 백제 부흥 운동은 계속되었다. 또한 당군이 백제 땅을 신라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한 점, 김유신과 소정방의 갈등 등이 이후 나, 당간의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