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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불행한 가정사, 기생 두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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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의 저서 《퇴계문집

 

 

이황,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불행한 가정사, 기생 두향

 

 

 

이기 이원

 

이이와 더불어 한국성리학(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적 사상 및 영남학파의 창시자인 이언적

주리설을 계승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

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 시대에는 기몬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식과의 논쟁

 

이황은 조식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조식은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

친다"고 맞대응 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황의 조식 비판은 후일 정인홍이 조식을 옹호하는 글을 올림으로서 다시한번 재현된다.

 

"臣(鄭仁弘)이 젊어서 조식(曺植)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은혜를 중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군사부일체

(君師父一体)의 의리가 있고, 늦게 성운(成運)의 인정을 받아 마음을 열고 허여하여 후배로 보지 않았는데,

의리는 비록 경중이 있으나, 분 모두 스승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故 찬성 이황(李滉)이 조식(曺植)을 비방한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뻗뻗한 선비는 中道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老莊을 숭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운에 대해서는 淸隱이라 지목하여 한 조각의 절개를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원통하고 분하여 한 번 변론하여 밝히려고 마음먹은 지가 여러 해입니다.

 

(중략) 曺植과 成運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뜻이 같고 도가 같았읍니다.

태산교옥(泰山喬嶽) 같은 기와 정금미옥(精金美玉)과 같은 자질에 학문의 공부를 독실히 하였으니 ...

 

(중략)...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道에 살았읍니다만 평생에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이토록 심하게 비방하였는데, 신이 시험삼아 그를 위해 변론하겠습니다.

이황은 과거(科擧)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아가지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中道)라 여겼습니다.

 

조식과 성운은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山林)에서 빛을 감추었고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부름을 받아

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滉이 대번에 괴이한 행실과 老莊의 道라고 인식하였으니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중략) 더구나 조식성운은 비록 세상을 피해 은거하였다고 하지만 선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달려가

서 한 번 임금을 존중하는 뜻을 폈고, 누차 상소를 올려 정성을 다해 치안과 시무를 발씀드렸는데,

이것이 과연 괴벽의 도리이며 이상한 행실입니까.

 

그때 나이 이미 70이었습니다.

 

어찌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나이인데 出仕하려고 하겠습니까.

수레를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실을 닦고 삶을 마친 것이 과연 중도(中道)에 지나치고 괴이한 행실을 한

것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老莊의 학문이란 말입니까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후일 조식의 제자와 이황의 제자들은 율곡 이이성혼의 제자들과 대립하며 동인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황의 제자와 조식의 제자 간 사상의 차이는 다시 을 양분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거유의 상이한 출세관과 학문관은 결국 남인북인의 분화로 이어졌고, 당쟁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원인

이 되었다.

 

이이와의 논쟁

 

그는 사물을 이(이성)과 기(물질, 힘)로 보되, 이와 기는 서로 다른 것으로 보고 이기이원론을 주장했다. 또한 이기이원론이면

서도 이로써 기를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이는 이와 기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이이와 논쟁하게 된다.

 

이황은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수용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인정하여, 후생가외라 불렀다.

그러나 젊은 이이가 스승 이황과 논쟁하는 것을 본 이황의 문하생들은 이이에게 적개심을 품기 시작한다.

 

이후 지배층의 논리인 서인 이이의 이기일원론에 대항하여, 이황의 제자들은 논쟁을 공리공담으로 여긴 조식의 제자들, 이언

의 제자들과 연합하여 영남 학파와 동인 붕당을 형성하게 된다.

 

일본 유학에 영향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유학의 발전

에 기여하였다.

 

1592년(선조 25년)부터 발생한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지역의 서적과 도공 등이 상당수 약탈당했는데, 이때 이황의 저서가 상

수 약탈당하였다.

 

경상북도의 해안가를 통해 유출된 이황의 서적, 서한들은 후일 일본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미국에 의해 서구 문물이 강제로 유입되기 전까지 일본에는 조선에서 전래된 이황 계열의 성리학이 막부 세력의 사상

적 기반이 되어 유행하였다.

 

양명학에 대한 이단시

이황은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후에 최명길은 퇴계에 의하여 이단으로 지목되었던 양명학을 남몰래 공부하여 양명학적인 사상을 저술에서 암암리 드러낸다.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에서 양명학을 '사문(斯文·주자학)의 화'라고 비판했다.

그가 양명학을 '사문의 화'라고 비판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에는 양명학의 핵심인 '치양지설'(致良知說)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으니 <전습록> 전체를 보지 못하고 비

판한 셈이 된다.

 

문하생

 

소고 박승임, 성암 김효원,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등을 문하생으로 배출한다.

김효원동인의 영수가 되었고, 박승임은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그 제자들 중 일부는 북인, 일부는 남인으로 출사한다.

 

류성룡과 그의 주변 인물들, 제자들은 모두 남인으로 이어진다.

양반가의 자제들 외에 상민의 자제들도 그의 문하에 출입하여 수업하고 배울 수 있었다.

 

그가 소수서원에서 성리학 강학을 할 때면, 대장장이 배점이 뜰에 꿇어 엎드려 배우기를 간청하자 그는 이를 허락한다.

그가 죽자 배점은 3년간을 상복을 입고 소식(素食)하며 심상(心喪)했다.

 

불행한 가정사

 

생후 1년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에게서 성장했다.

그러나 45세 되던 해 을사사화로 친형 이해가 연루되어 처형당한다.

 

첫 부인 허씨를 27세에 잃고, 재혼한 둘째 부인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46세에 사별한다.

그러나 그는 이 둘째 부인을 무척 가여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는 재혼하지 않고 48세 때 만난 기녀 출신 소실 두향 외에는 일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평생을 보냈다.

 

1548년 2월 이황의 둘째 아들이 일찍 요절하였다.

그는 둘째 며느리는 정혼한 후 1년도 안되어 남편이 죽고 청상과부가 되자, 며느리의 개가를 허용하고 남의 눈을 피해 친정으

로 몰래 돌려보낸다.

 

그가 선조 즉위 초 한성부로 가던 길에 한 주막에 들렀을 때, 그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해온 이가 있었는데 그때 그가 개가

를 허용한 둘째 며느리였다 한다.

 

한성부에 분가한 그의 손자 내외가 아이에게 고열이 있어서 위중하자, 그에게 도움 요청을 하였으나 그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의 증손자는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그보다 앞서 사망하고 만다.

 

평가

 

그의 제자 중 학봉 김성일은 선생께서 산과 계곡을 거닐 때면 마치 '신선 같다'고 평하였다.

유홍준은 '퇴계는 평생에 처사가 되기를 원하여 죽을 때 영정에 벼슬이름을 적지 말고 '처사'라고 써주기를 희망했다지만 그

처사 지망생이었지 처사는 아니었다.'라고 평하였다.

 

당대에 이미 그의 제자들은 경상좌도와 영남학파를 형성하였으므로 영향력이 있었다.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사림 확산에 기여

 

풍기군수 재직 중 서원들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으며, 백운동 서원의 현판을 왕의 사액 하사운동을 추진하여 성공시킨다.

이후 서원의 보급과 사액서원의 수가 늘어나면서 사림파(士林派)의 세력의 확장에 기여하였다.

 

또한 조식의 문하생인 북인소북대북으로 나뉜 뒤, 소북이 대북에게 숙청되고 대북은 서인에게 숙청되면서 그의 문하는

퇴했고, 이언적은 많은 제자를 내지 못하여 이황의 제자들이 영남학파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성호학파에 영향

 

후대의 실학자 성호 이익은 자신의 학문적 뿌리를 이황에게서 찾으려 했다.

성호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을 비롯한 선대 인사들은 대부분 윤휴와 가깝게 지냈다.

 

이익의 6촌 형님뻘 되는 반계 유형원도 윤휴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절친한 사이였다.

또한 성호 이익의 스승 중 한사람인 송곡 이서우는 윤휴와 허목 모두에게서 수학하였다.

 

이에 따라 성호 이익의 문도들 중에는 윤휴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며 그의 학문을 계승했음을 강조하였다.

윤휴와의 관계를 다소 부담스럽게 여겼던 성호 이익은 자신의 학통을 퇴계 이황이 근원임을 여러번 강조하였다.

 

이익 가문의 학문은 17세기까지 북인 계열의 윤휴와 상당히 유사하였다.

이하진이나 이잠 형제, 조하주 등은 윤휴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이익의 6촌 형인 유형원윤휴와 자주 만나며 연락하던 사이였다.

 

반면 뒷날 이익이 계승한 인물로 평가받는 허목과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이때까지 이익 집안의 학문은 성리학적 흐름과는 무관하였으며, 오히려 주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1699년 이잠은 정시한을 예방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는 퇴계학 수용의 증거로 지목된다.

정시한은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이서는 주희의 경전 해석을 따르면서 이황의 학문을 수용하였다.

 

이익 단계인 1710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이기심성론과 관련된 저술을 하면서 학파를 개창하기에 이르렀다.

퇴계학을 수용하고 이기심성론과 관련된 성과를 낸 성호 이익은 이제 이황과 자신을 연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윤휴의 학문이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이라는 비판적인 견해가 계속 제기되자 이를 부담스럽게 느꼈던 성호 이익은 학

문적 전통을 윤휴에게서 찾던 형 섬계 이잠이나 유형원 등과 달리 허목을 거쳐서 퇴계 이황으로 연결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이익의 스승 중 한사람인 이서우허목과 윤휴 모두에게서 수학한 것에서 근거로 삼았다.

1715년에서 1720년 사이 성호 이익은 전대에 거리가 있었던 허목과 이하진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허목을 자신이 사숙한 스승

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퇴계학으로 자정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근기 남인들에게 수용되었다.

한편 이익은 허목의 후학으로 자정한 이후에도 경전해석이나 경세론 분야에서는 여전히 윤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전통적인 윤휴와의 계통을 강조하였는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학문 경향을 보였다.

윤휴를 강조하던 인사들이 신유 박해로 몰락하면서 성호 학파의 학통은 오로지 퇴계학과 관련된 내용으로 전승되게 된다.

 

이익은 이황의 사상을 직접 계승하지는 않았으나 이익의 스승 중 한명인 이서우허목의 문인이고, 허목의 스승인 정구

이황의 문하에서도 배웠고, 조식의 문하에서도 공부하였다.

 

이익은 이 점을 들어 퇴계 이황과의 관련성을 계속 강조하였다.

북인계 학문의 전통을 가진 윤휴에게 영향을 받은 성호 학파는 지속적으로 퇴계학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자 하

였으며, 이는 18세기 후반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완성되었다.

 

기생 두향

 

그에게는 소실로 '두향'이라는 기생이 있었다.

1548년(명종 3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한 후 만난 기생 두향은 이후 그가 떠나간 뒤에도 그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1571년(선조 27년) 그의 부음을 들은 기생 두향충주 강선대에서 충주호로 몸을 던져 투신했다.

그 뒤 매년 10월이면 이황의 후손들은 이황에 대한 절개를 지켜 순사한 두향의 묘소를 찾아 벌초하고 시제를 드린다 한다.

 

일화

 

그가 도산서원에 있을 때 어느 행인이 말을 타고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시중을 들던 제자들과 하인들이 지나가는 이의 무례함을 지적했다.

 

'선생님, 저 사람 행동이 지나칩니다. 선생님 앞을 지나면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황은 '내버려 두어라, 말 탄 사람이 그림속의 사람처럼 좋은 경치를 더해 주는데 무슨 허물이냐?'라며 하인과 제자

들에게 자신을 못알아보는 행인을 내버려 두라고 지시한다.

 

이문형, 윤두수, 윤근수 등을 탄핵했던 훈구파 권신 이감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그를 찾아 문안인사를 드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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