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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살수대첩 고구려 - 수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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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살수대첩 고구려 - 수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다.

 

 

살수 대첩(薩水大捷)은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장식한 살수에서의 전투이다. 살수(薩水)의 현재 위치에

해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지금의 청천강으로 비정하고 있다.

 

 

612년 1월(음력)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이 발발하여 수 양제는 1,133,800명의 병력으로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과 여러 성으

출병하였다.

 

그러나 여러 달 동안 함락시키지 못하고 피해가 누적되자 6월(음력)에 수군(水軍)과 육군으로 편성된 별동대를 조직하여 평

성을 단숨에 공격하려 하였다.

 

육군은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 우익위대장군 우중문(于仲文), 좌효위(左驍衛)대장군 형원항(荊元恒)

수군(水軍)은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 좌무위(左武衞)장군 주법상(周法尙)이 지휘하였다.

 

육군보다 빠르게 평양의 패수(浿水)에 도착한 내호아는 부총관(副摠管) 주법상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

했다가 대파당했다.

 

이로써 평양성으로 향하는 별동대는 305,000명의 육군만이 남았다.

 

진행

 

별동대는 원래 100일치 식량과 방패, 갑옷, 창과 옷감, 무기 등 온갖 물자를 갖추어 행군을 시작하였으나 병사들이 3섬 이상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

 

쌀과 조를 버리고 가는 자는 목을 베겠다는 군령이 떨어졌음에도 모두 군막 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그래서 행군 도중부터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이때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거짓 항복하며 수군(隋軍)의 군영에 들어가서 그 허실을 보았다.

 

을지문덕이 오면 사로잡으라는 양제의 밀지를 받았던 우문술과 우중문은 그를 억류하고자 하였는데 위무사(慰撫使)로 종군

고 있던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말려서 그만두고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이내 후회하여 을지문덕을 다시 오라고 하였으나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鴨綠水)를 건너가버렸다.

우문술은 을지문덕도 놓쳤고 식량도 다 떨어져서 돌아가려고 했지만, 우중문은 성을 내며 계속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우문술 역시 언성을 높였으나, 일전에 양제가 우중문에게는 계획성이 있으니 절도를 품어서 자문을 구하라고 하였기에 부득

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여 초반에는 하루에 7번 싸워 모두 이겼다.

여러 번 승리한 것을 믿고 계속 진격하니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와서 진을 쳤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을지문덕의 기만에 의한 유도 작전이었다.

수군(隋軍)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이들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매번 싸울 때마다 달아났던 것이었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는 희롱하는 시를 보내고, 우문술에게는 거짓 항복하며 만약 군대를 돌리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行在

所)로 가서 뵙겠다고 하였다.

 

수군(隋軍)은 지칠대로 지쳐서 다시 싸우기가 힘들었던 데 반해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단숨에 함락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거짓 항복을 명분으로 삼아 회군을 시작하였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건제를 유지하여 방진(方陣)을 갖추며 퇴각하였고 이에 을지문덕은 끈질기게 추격하여 가다 싸우기를 반

복하였다.

 

7월(음력), 마침내 수군(隋軍)이 살수에 이르러 반쯤 건너자, 고구려군이 뒤에서 후군을 공격했고 수나라 장수 신세웅이 전사

하였다.

 

이에 여러 군대가 함께 무너져서 걷잡을 수 없게 되니 장수와 사졸들이 달아났다.

하루 밤낮 만에 압록수에 닿았으니 그 거리가 450리였다.

 

이때 왕인공(王仁恭)이 최후의 부대가 되어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막아냈다.

평양 밖 포구에 주둔하고 있던 내호아도 살수대첩의 소식을 듣고는 퇴각하였다.

 

결과

 

아홉 군이 처음 요하(遼河)에 이르렀을 때의 병력은 305,000명이었으나 그 중에 요동 반도로 다시 돌아온 자는 겨우 2,700명이

었다. 수많은 군수물자와 공성병기는 모두 잃어버렸다.

 

양제는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7월 25일(음력)에 본대 병력을 이끌고 철수하니 제2차 고수전쟁은 고구려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우문술 등 살아남은 장수들은 모두 작위가 박탈되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다만 설세웅은 분전(奮戰)한 점이 감안되어 면직으로 그쳤고, 위문승은 홀로 전력을 보전한 채 퇴각한 공이 있어 금자광록대

부(金紫光祿大夫)로 승진했다.

 

을지문덕을 잡을 기회를 놓치게 했던 유사룡은 참수되었다.

양제는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듬해 우중문을 제외한 모든 장수를 복권시키며 제3차 고수전

쟁을 일으킨다.

 

여담

 

흔히 살수 대첩 하면 귀주 대첩(龜州大捷)과 함께 수공(水攻)을 떠올린다.

러나 《삼국사기》, 《수서》, 《자치통감》, 《동사강목》, 《해동역사》 등 한국과 중국의 사서에서는 둑을 무너뜨려 수공

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오직 근대 기록에만 등장하는데 이는 민간의 전설이었던 칠불전설(七佛傳說)이 변형되어 수록된 것이다.

실제 수공을 활용한 전투는 흥화진 전투(興化鎭戰鬪) 뿐이다.


〈유우중문(遺于仲文)〉의 발송 시점은 《삼국사기》와 《수서》간에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수군(隋軍)이 평양 근처까지 왔을 때 시를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수서》에서는 을지문덕이 수군

(隋軍)의 진영에서 돌아와 압록강을 건넌 직후 시를 보내 우중문을 도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도발에 넘어간 우중문이 우문술의 철수 권유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며 압록강을 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을지문덕이 유인작전을 벌일 때 청야 전술도 사용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을지문덕의 시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보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 오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을 다했노라.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 전쟁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 만족함을 알고 그만 두기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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