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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귀주대첩, 흥화진에서 거란군을 격파한 고려시대의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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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감찬, 귀주대첩, 흥화진에서 거란군을 격파한 고려시대의 명장

 

강감찬(姜邯贊 또는 姜邯瓚, 948년 12월 22일(음력 11월 19일) ~ 1031년 9월 9일(음력 8월 20일))은 고려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다. 강이식의 후손으로, 어릴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금주(지금의 낙성대)에서 태어났으며, 묘는 충청북도 청주시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요나라의 3차 침입을 격퇴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은 검교태위 문하시랑에 이르렀고, 작위는 천수현개국자작(天水縣開國子爵)에 봉해졌다. 무관으로 알려졌으나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 장군이었다.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고,본관은 금주(衿州) 또는 진주이다.

 

요나라의 1차 침입
993년 요나라(거란)의 성종송나라와 고려 사이의 친선 관계를 차단하였다. 또 고구려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우기면서 옛 고구려의 영토를 달라면서 소손녕(蕭遜寧)을 보내 고려를 침공하였다. 서희(徐熙)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요의 땅도 다 고려 땅이라주장하면서,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내쫓고 옛땅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말에 설득된 소손녕은 물러갔고, 고려는 서희의 담판의 결과로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요나라의 2차 침입
1010년(현종1년) 요나라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40만 군으로 서경(西京)을 침공하였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강감찬은 요나라에 항복하자는 다른 중신들에 반대하며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다. 하공진(河拱辰)이 적을 설득하자 요나라군은 고려에서 물러갔다. 요나라 군이 돌아가던 중 양규(楊規)가 고려에서 물러가는 요군을 뒤에서 쳐 고려는 큰 승리를 거두고 요는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이듬해인 1011년 국자제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 등을 역임했으며, 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임하였다. 서경 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 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책에 임명된 것은 요나라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요나라의 3차 침입
1018년(현종 9) 요나라는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북면 행영 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했다. 흥화진(興化鎭)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는 전술로 혼란에 빠진 요나라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자주(慈州)와 신은(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귀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금화팔지(金花八枝: 금으로 만든 꽃 여덟 송이)를 머리에 꽂아 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서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귀주대첩의 승리로 요나라는 침략 야욕을 포기하게 되었고,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정식 외교 관계는 단절하였지만, 무역 및 문화 교류는 계속 이루어졌고, 요나라도 송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수준에서 송과도 긴장된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전쟁 이후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에 봉해지고 식읍 3백 호를 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에 봉해져 식읍 5백 호를 받은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에 봉해지고, 식읍 1천 호를 받았다.

 

​사후

죽은 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현재 그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문종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향년 84세.

 

​설화

고려시대의 명장으로 거란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으며 달아나는 적을 귀주대첩에서 크게 격파하여 수많은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왕이 보낸 어떤 사자가 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오다가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관리를 보내어 펴보게 했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그 사자가 기이하게 여기고는 데리고 개경으로 돌아와 길렀는데, 이 사람이 바로 강감찬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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