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담의 난, 선덕여왕대의 반란, 왕위찬탈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다. 비담(毗曇, ? ~647년 음력 1월 17일) 은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 말기의 진골로 추정되는 귀족이며 성은 김(金), 상대등(上 大等)을 역임했고 반란을 일으킨 역신(逆臣)이다. 삼국사기 선덕여왕조, 김유신 열전에 등장한다. 생애 출생 연도, 부모 등 출생에 대한 사항 및 업적 등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전혀 없다. 하지만 선덕여왕 재위 말기 화백회의의 수장좌이자 신라의 최고 벼슬인 상대등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상대등 신라 제 27대 국왕인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재위 말기인 645년에 화백회의의 수장인 상대등이 되었다. 비담의 난 비담의 난(毗曇-亂)은, 645년 상대등에 오른 비담이 권력을 장악하여 647년 1월, "여주불능선리(여군은 나라를 다스릴 그릇이 못 된다)" 라는 명분을 내걸고 염종의 군사와 함께 출정하여 일으킨 선덕여왕 대의 반란이다. 선덕여왕의 정치를 문제삼아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선덕여왕이 병세가 깊어 진덕여왕을 후사로 삼자 이에 대항하여 왕위찬탈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유력하다. 비담은 월성(月城)을 먼저 장악한 김유신에 밀려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따르면, 비담의 반란은 10여 일 만에 진압당했다. 삼국사기 진덕여왕조에 따르면, 비담과 그의 일족 30명은 정월 17일에 처형됐다. 그러나 비담의 난이 진행되는 도중인 정월 8일, 선덕여왕은 승하하였고, 이어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신라의 제28대 국왕으 로 즉위하였다 계기 647년 1월, 비담은 주위의 꾐에 넘어가 염종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때 선덕여왕의 심장병은 최고조에 달하여, 선덕여왕의 기력이 쇠할 때를 노려 난을 일으켰다는 일설이 있다. 월성에서의 전투 난의 혼란스러운 기간 동안, 월성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김유신이, 먼저 월성을 장악하여 세가 밀린 비담은 월성에 진을 쳤다고 전해진다. 월성 추락 난 도중, 밤에 큰 유성이 떨어지자 이를 본 비담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 별의 추락은 여주가 패망하고 새로운 계림이 세워 질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본 유신군은 사기가 좋지 않았다. 이로 비담의 승리가 다시 보이는 추세가 되었다. 승패 확정 이 때, 김유신은 한 가지 꾀을 내었는데 큰 연에다 불 붙인 허수아비를 달았고 그 연을 날렸다. 이는 꼭 별이 다시 올라가는 것처럼 보여, 반란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이 때를 공략해 김유신은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비담의 죽음 비담은 토벌소식을 듣고 급히 도망쳤다. 그러나, 차마 서라벌도 못 벗어나고 김유신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진덕여왕 즉위 혼란스런 난 도중인, 647년 1월 8일에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말았다. 결국 진덕여왕이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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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의 난, 선덕여왕대의 반란, 왕위찬탈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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