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다.
고왕(高王, ?~ 719년, 재위: 698년 ~ 719년)은 남북국 시대의 북국인 발해(渤海)의 초대 국왕이며, 성은 대(大)이고, 휘는 조영(祚榮)이다. 고왕은 고구려의 장수 걸걸중상의 아들로서, 고구려의 유민이자 옛 고구려의 장수이다.
고왕과 발해에 관해 중국 측 기록인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발해 말갈의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으로서술하고 있지만, 《신당서》(新唐書)에서는 본래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속말말갈의 한 일파라고 서술 되어있어 고구려와의 종족 관계를 모호하게 기록하였다. 한국측 기록인 삼국유사에 인용된《신라고기(新羅古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고왕을 고구려 장수라고 기록하였다.
고구려 무장
당시 고구려(高句麗)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사망한 직후 그의 세 아들인 연남생(淵男生)과 연남건(淵男建), 연남산(淵男産)의 권력 다툼을 벌였다. 결국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연남생(淵男生)은 당나라에 망명했다. 당나라는 667년 연남생(淵男生)을 앞세워 고구려(高句麗)를 침공하였다. 최고 권력자였던 연남생(淵男生)의 합류로 고구려(高句麗)는 크게 무너져 당나라는 파죽지세로 평양성(平壤城)으로 진격했다.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高句麗)는 멸망하였다.
고구려 부흥 운동과 발해 건국
고구려가 멸망한 후 옛 고구려 영토에는 당나라가 통제하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세워지고, 남아있던 고구려 세력 또한 671년 안시성 함락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분산 정책에 따라 유민을 여러 지역으로 끌고 갔는데, 이때 걸걸중상 대조영 부자도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 한편, 696년 영주에서는 당나라의 지나친 억압 정책에 대한 거란족(契丹)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생겨난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걸걸중상과 말갈의 족장 걸사비우(乞四比羽)는 영주에서의 이탈을 감행했고, 측천무후(側天武后)의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동쪽으로 이동, 당의 장수 이해고(李偕固)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과 전투를 벌였다.이 때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죽고, 대조영은 남은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을 이끌게 되었다.
대조영은 698년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의 추격군을 격파해 승리하고 동모산(東牟山, 지린 성 돈화 부근)에서 발해(渤海)를 건국하였다. 당의 북진 정책을 위협하던 돌궐(突厥)과 손을 잡아 대당 견제세력을 구축했다.
국제 관계
대조영은 705년에 당과 화친하였고, 713년, 당나라는 고왕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渤海郡王) 홀한주도독부도독(忽汗州都督府都督)으로 명목상 책봉하였다. 719년, 고왕이 붕어한 뒤 그의 아들 대무예가 왕왕위를 이었다. 당나라는 발해를 고립시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고왕은 돌궐과 동맹 관계를 형성하며 고립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는 발해의 세력이 건국 초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해졌음을 의미한다.700년에는 발해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신라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친밀한 것도 아니었다. 신라의 유학자 최치원(崔致遠)은
"발해의 왕인 고왕이 신라와 수교를 맺고 싶어 사람을 보냈는데, 신라 효소왕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고왕에게 대아찬이라는 관작을 하사하였다"
라는 기록을 사불허북국거상장, 동사강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와 발해는 당시 몇 차례 교류가 있었으나 친선적인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는 첫째로 양국이 그 무렵에는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아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다. 신라와 발해가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8세기 초반에 발해가 본격적으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양국이 함흥 일대에서 직접 국경을 접하면서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