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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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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육신 묘

 

사육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하다.

 

 

사육신(死六臣)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신하를 이르는 말이다.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신하들을 통칭하여 다른 훈구파와 구별하여 따로 절의파(節義派)로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시신은 노량진 근처에 매장되어 있다.

 

사육신이 세조와 덕종, 예종 삼부자를 연회장에서 척살할 계획으로 유응부, 성승, 하위지를 별운검으로 세조 3부자의 뒤에 세

웠다가 3부자의 목을 벨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 동조자 중 김질이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를 폭로함으로써 실패로 돌아

간다.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관련자 500~800여명이 처형, 학살되었으며, 사육신 중 현재 박팽년과 하위지만이 직계 후손이 전한다.

 

그 밖에 사육신 가문의 가까운 친인척 중 살아남은 인물은 이개의 종증손이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고 종고손은 북인당수

이산해였다.

 

생육신의 한사람인 성담수가 사육신 성삼문의 6촌 동생이었다.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들의 종과 노리개, 첩으로 분배되었으며 권영금 같은 이는 권람의 친족인 덕에 욕을 모면하였다.

 

사육신은 성종 때부터 도학을 좇는 분위기가 나타나 동정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때부터 영조 때 노론 강경파들에 의해 복권되

었다.

 

개설

 

세종대왕이 죽으면서 자신의 장남 향(문종)도 오래 못살 것이라 판단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어린 손자 홍위를 부탁할 것

을 유언하였다 한다.

 

단종이 강제로 폐위되자 이들은 세조 암살을 통해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으나, 밀고자에 의해 적발되어 혹독한 고문끝에 일가

족과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당했다.

 

당시 시체는 처형장인 새남터에 그대로 버려졌으나, 생육신중 하나인 매월당 김시습에 의해 몰래 매장되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노량진에 사육신을 기념하는 묘지가 있다.

 

사육신은 성삼문,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이개, 유성원 여섯 명이고, 기타 윤영손(尹鈴孫), 김문기와 성승, 김질, 권자신

(權自愼) 등이 가담했다.

 

그리고 신숙주는 참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김질이 끝에 장인 정창손에게 이 사실을 누설했다가, 정창손 등의 설득에 넘어가 계획을 폭로하게 되면서 사육신과 유

응부, 성승 등은 모두 참살당했다.

 

한편 사육신 집안의 여성들은 난신에 관계된 부녀자라 하여 노비가 되거나 관노, 기생 등으로 끌려갔다가가 뒤에 일부 석방되

었다.

 

사육신의 시신은 성삼문의 사위인 박임경이 수습하여 한강변 노량진에 매장하였다.

남효온은 김문기가 아닌 유응부를 사육신으로 기술하였으며 보통 유응부가 사육신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견해에는 김문기가 사육신이라는 설도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백촌 김문기를 사육신에 포함하는 의견을 낸 일이 있으며, 1978년 기존 사육신에, 백촌 김문기 선생을 추가

로 사육신에 현창하였다.

 

노량진 사육신 묘역 조성 당시, 기존의 사육신 묘와 함께 김문기의 허묘와 위패가 추가로 봉안 되었다.

이후 아직도 사육신에 관한 논란이 있다.

 

단종 복위 운동

비록 선위 형식으로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계략에 따른 왕위의 강탈이었다.

 

이러한 처사에, 특히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성삼문·형조참판 박팽년·직제학 이개·예조참판 하위지·사예 유

성원 등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무인 유응부 등은 상왕으로서 수강궁에 있는 단종의 복위와 반역파의 숙청을 꾀하고 그 기회

를 엿보고 있었다.

 

1456년 세조 2년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향응하는 기회를 타서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계획이 어긋나자 김질·정창손 등

은 사태의 불리하자 거사를 밀고하였다.

 

세조는 곧 성삼문 등에게 참혹한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 굴하지 않았으므로 성삼문·박팽년·유응부·하위지등은 거열형에 처해져

찢겨져 죽었고 유성원은 자기 집에서 자살한 후 역시 거열형을 당했다.

 

이들을 사육신이라 부르며, 이에 연루된 자로 권자신·김문기 등 70여 명도 모두 처벌되었다.

 

사형

 

사육신 중 하위지와 유응부는 세조가 죄를 시인한다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으나 스스로 사양하고 죽음을 택했다.

 

사육신과 그 가족들은 본인과 아버지, 형제, 아들, 손자, 조카까지 모두 연좌되어 처형당했고, 생후 1년, 2년된 어린 남자아이

는 입에 소금을 채워 질식사시키거나 나이가 찬 뒤에 처형하였다.

 

백부, 숙부, 조부, 종조부, 사촌까지는 노비로 보내지거나 관노로 고을에 영속되거나 병사로 충군당했고, 5촌 이상은 유배형을

당했다.

 

사육신 사건으로 500여 명에서 800여 명이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후

 

사육신 일족 중 후손이 생존하고 있는 집안은 박팽년가와 하위지 가문이 있다.

 

하위지의 조카 중 하포, 하박, 하원 등은 미성년자라서 처형되지 않았고, 박팽년의 며느리 이씨는 자신이 낳은 아들과 박팽년

가의 노비로 함께 끌려온 여종의 딸을 바꾸어서 자신의 딸이라 주장하여 아들을 살렸다.

 

아들 박비는 성종 때에 자수하여 특별히 사면되고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사육신의 시신이 매장된 뒤 세조는 이를 보고 당대에는 역적이지만 후대에는 충신이 되겠다고 한탄한 바 있다.

 

한편 사육신의 편에서 세조의 편으로 전향한 신숙주, 김질, 정인지는 배신자의 상징처럼 여겨져 비판과 지탄,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사육신은 사후 중종 때 가서야 복권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현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이 사육신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계

속 올려 영조, 정조 때에 관작이 복구되고 증직과 시호가 내려졌다.

 

1782년 정조는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박팽년을 추모하여 노량진에 조선육신 이라는 신도비를 세워주었다.

추후, 박정희 정권 때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해 김문기를 기존 사육신에 추가로 현창하였다.

 

김문기의 가문은 현재 다수가 생존하고 있다.

 

시신의 매장


 

사육신의 시신은 누가 매장하였는지 정확하게 알려져있지 않다.

통설에 의하면 매월당 김시습이 비밀리에 사육신의 시신을 한강변에 매장했다고 한다.

 

비밀리에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한 이는 어느날 야밤에 성삼문,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이개, 박팽년의 시신과 박팽년의 형제

들과 부친 박중림, 성삼문의 형제들과 성승의 시신을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노량진에 안장하였다.

 

이때 박팽년의 형제들과 부친을 근처에 묻고 박씨지묘라는 비석을 따로 더 세웠고, 성삼문의 형제들의 시신을 성삼문 묘 근처

에 묻고, 성승의 묘는 성삼문의 묘의 앞쪽 혹은 뒷쪽에 묻고 성씨 지묘 라고 쓴 비석을 두 기를 더 세웠다.

 

그러나 후일 성승의 묘로 전하는 묘소는 실전되었고, 후대에 충청북도 홍성군에 성승 장군과 그보다 앞서 사망한 본부인의 묘

소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성승의 묘소에 실제 성승의 시신이 있는가 여부는 불투명하다.

근처에는 성삼문의 생가와 사육신 사건 이전에 사망한 성삼문의 본부인 묘소도 있다.

 

사육신

 

성삼문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이개

유성원

김문기 (1982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사육신의 일원으로 인정)

 

사육신 명단 논란


부산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인 이재호는 자신의 저서에서 국사편찬위원회의 1978년에 있었던 판정은 당시 권력자였던 중앙정

보부장 김재규의 압력을 받은 결정이라고 주장하면서, 중앙정보부장이 자신의 가문의 조상인 김문기를 사육신의 일원으로 넣

으려는 권력자의 의도라고 반박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김문기는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삼중신 중의 한 명으로, 사육신과는 별도로 위패를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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