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변절하여 수양대군 편에 가담하다.
신숙주(申叔舟, 1417년 8월 2일 (음력 6월 20일) ~ 1475년 7월 23일 (음력 6월 21일)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문신·정치가이며 언어학자, 외교관이다. 훈민정음 창제자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字)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장(申檣)의 아들이자 윤회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하였다.1447년(세종 29년) 문과 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적극 지지하였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 번 출정하였으며 1461년부터 1464년,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다.
사육신과 함께 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로 즉위)의 편에 가담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 실패 후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 때 남이의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으며, 1980년대 이후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동국정운》 등의 편
찬에도 참여하였으며, 농업과 축산업 기술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를 편저하였다.
생전에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번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습, 그 밖에 한명회, 권람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윤회, 정인지의 문인이다. 전라남도 출신.
출생과 가계
1417년(태종 17년) 음력 6월 20일 희현당 신숙주는 고령신씨 신포시의 손자이며 공조 참판을 지낸 신장(申檣)의 아들로 그의 외가가 있던 전라남도 나주군 노안면 금안리 오룡동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주 정씨는 지성주군사(知成州郡事)를 지낸 정유(鄭有)의 딸이다. 위로 형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가 있었고, 아래로 동생인 신송주(申松舟)·신말주(申末舟)가 태어났다. 또한 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인 부부인 신씨는 신숙주의 삼촌 신평(申枰)의 딸로, 신숙주는 연산군에게는 외외재종조부가 된다.
그의 조상들은 본래 경상북도 고령현(高靈縣)의 향리였으나 신숙주의 7대조가 되는 신성용(申成用)이 처음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 벼슬이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에 이르렀다. 증조부 신덕린(申德隣)은 전의 판서(典儀判書)를 지냈고, 할아버지 신포시는 공조참의를 지냈다. 아버지 신장은 남에게 맞서기를 싫어하는 온화한 성품의 문인이었으나 술을 좋아하였는데 동료 문인인 허조는 "이런 어진 사
람을 오직 술이 해쳤다."며 한탄할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 의하면 "사람됨이 온후하고 공순하여 남에게 거슬리지 아니하였다. 사장(詞章)에 능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므로, 임금이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삼가도록 친히 명하였으나, 능히 스스로 금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신장은 아들들의 이름에 술을 뜻하는 의미의 주 자를 붙였는데, 다섯 아들들의 이름이 신맹주(申孟舟)·신중주(申仲舟)·신숙주(申叔舟)·신송주(申松舟)·신말주(申末舟)였다.
아버지가 관료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고향 나주를 떠나 본가인 한성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신장은 글씨를 잘 썼는데 숭례문의 현판 글씨 중 하나는 그의 글씨체라는 전설이 전한다. 동생 신말주의 손자 신공섭은 조선후기의 유명한 화가 신윤복의 선조로, 신윤복은 신공섭의 서자 신수진의 7대손이었다. 한편 일제 강점기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그의 직계 18대손이 된다.
어린시절
신숙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기억력이 남달랐는데, 자라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 예견하고는 했다. 성격은 침착하여 깊이 생각하고 난 뒤에 말을 하였다. 신숙주는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글씨를 배웠는데, 글재주에 뛰어났다. 뒤에 윤회와 정인지의 문인이 되어 그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첫 스승인 윤회는 하륜과 정도전의 문인으로, 그를 통해 이색과 백이정, 안향의 학통을 사사하였다. 뒤에 그는 스승 윤회의 손녀사위가 되는데, 신숙주는 윤회의 아들인 증 영의정부사(贈領議政府事) 윤경연(尹景淵)의 딸 무송 윤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뒤이어 정인지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는데 그를 통해 정몽주의 학문도 계승하였다. 그는 학문을 연마하면서도 동리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서당을 열고 천자문과 소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독서와 학문을 좋아하여 천하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시문(詩文)을 잘 지어서 묘사를 잘 하고 분방하였다. 그는 일찍이 탐진강과 영산강의 강물이 황해 흐르는 것을 보며 바다는 산골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든 말과 소를 씻은 더러운 물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다라고 하였다. 1438년(세종 20년) 21세의 나이에 시(詩)와 부(賦)로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가 그해의 진사시에도 모두 합격하여 바로 진사가 되었다. 그 뒤 초시(初試)에 장원한 뒤, 복시(覆試)에도 장원하였다.
관료 생활 초반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3등(丙등급. 3위와는 다르다.)으로 급제하였고 그해에 전농시직장이 되었다. 이조(吏曹)에서 그를 성균관 문묘에 제례를 올릴 때 제집사(祭執事)로 특별히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조의 어느 늙은 서리(胥吏)가 잊어버리고 첩지(牒紙)를 전달하지 않아 일을 빠뜨리게 되자 사헌부에서 탄핵하였다. 이때 신숙주는 그 서리가 늙었지만 딸린 자녀들이 많다는 사정을 알던 그는 서리의 딱한 처지를 염려, 그가 죄를 받아서 파면당할 것을 염려하여 신숙주 자신이 거짓으로 자복하고 대신 징계를 받았다.
그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초시와 복시에 장원한 인물이며 정식으로 과거에 합격한 인재라서 파면되지는 않았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세종이 그를 특별히 용서해 주었고, 동료들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었다. 신숙주는 초시와 복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과거에도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글을 잘 지어 세종의 눈에 들었다.1441년 다시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讚)이 되었다.
그 뒤 입직할 때마다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으며,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아 하였다. 숙직이 없더라도 장서각에 있으면서 밤새도록 독서를 하였다. 윤회, 정인지의 훈도 외에도 다양한 독서 덕택에 경사와 고전에 두루 능통하였고 역사 지식이 해박하였다.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는 장서각에 들어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을 열심히 읽고 동료를 대신하여 숙직하면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공부하기가 일쑤였다. 숙직이 아닌 때에도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느라 밤을 샜다고 한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열성이 세종에게까지 알려졌으며, 세종은 그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발견하고 어의(御衣)를 하사하여 칭찬했다. 하루는 책을 읽다가 잠이 든 그를 발견하고 왕이 직접 자신의 옷과 포의, 이불을 내렸다 한다. 새벽에 깨어나 자신의 몸에 용포가 덮혀진 것에 깊이 감동한 그는 그는 오래도록 감읍하였다 한다.1442년(세종 24)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가 되었다. 이때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게 되어 글 잘하는 선비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기로 하였는데, 신숙주가 이에 뽑혔다. 집현전 학사로서 언어에 능해 중국어, 일본어를 비롯한 몽골어, 여진어, 유구어(琉球語) 등 동아시아 8개 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외교 활동
그 무렵 신숙주는 과로로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그 무렵 병이 나아 일어난 직후였다. 형제나 친구들이 여의고 피곤한 몸으로 어찌 먼 곳을 가겠느냐며 감당 못하리라 하여 힘써 말리고 저지하였으나 그는 자청해서 가겠다고 하였다.
"신하된 사람에게는 평탄하거나 험한 것이 한 가지이다. 어찌 제 몸이 편안할 것만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먼 길을 일가친척이 모두 말렸으나 신하된 사람으로 험하고 편한 것을 가릴 수 없다 하고 스스로 나섰다. 세종이 인견하면서 병이 들었다 하는데 갈 수 있겠느냐고 염려하자 그는 나아졌다며 어찌 회피하겠느냐며 일본으로 가기를 자청하였다. 1443년 2월 21일에 부사직(副司直)이던 그는 다시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어 조선 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 겸 종사관(書狀官兼從事官)으로 선발, 통신사가 파견되자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고, 언어와 한자, 유학을 가르쳤다. 일본을 여행할 때 그의 재주를 듣고 시를 써 달라는 사람이 마구 몰려들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시를 줄줄 내려써서 주니 모두들 감탄하였다. 10월 19일까지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와서, 당시의 견문록(見聞錄)과 일본의 인명·지명 등을 한자음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후에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가 1471년(성종 2)에 완성되었다. 특히 이 책의 ‘조빙응접기’ 항에서는 일본 사신의 응대법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여 국가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집현전 학사와 한글 창제
집현전수찬을 지내면서 그는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와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세종의 명으로 성균관 주부인 성삼문, 행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과 함께 당시 죄를 짓고 만주의 요동에 귀양을 와 있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갔다. 신숙주는 황찬을 만나 음운론과 인간의 발음, 언어에 대한 주요한 지식을 얻었고, 이후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면서 황찬을 찾아가 음운과 어휘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신숙주는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이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할 정도로 총명한 인물이었다.
신숙주는 집현전 내에서 새로운 글 연구를 찬성, 지지하는 입장에 섰으며 같은 편에는 신숙주와 그의 스승의 한 사람인 정인지, 신숙주의 동료인 성삼문, 정창손, 박팽년 등이 있었다. 또한 명나라의 사신이 조선에 입국했을 때도 태평관(太平館)에 친히 왕래하면서 사신으로 온 명나라학자에게 운서(韻書)에 대해 질문하여 그 음을 정확하게 하는 등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음운을 연구했다. 그의 학문열에 감격받은 명나라의 사신은 조선인 기생도 마다하고 그와 토론, 담론하며 연구하였다 한다.
그는 이두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몽골·여진어를 두루 구사하였는데, 훈민정음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들 언어를 비교 분석하고 조선인의 발음과 비교 분석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려냈다. 1446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세종대왕이 기획했던 말글정책을 충실히 보필하였으며,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에 참여하여 다른 일곱 학자와 함께 1446년(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해례본 편찬을 완료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집현전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가 그 해, 문과 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하여 통훈대부로 승진하고 집현전 응교(應敎)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겸경연시강관과 춘추관수찬관을 겸임하였고, 세자시강원필선(弼善)도 겸임하여 세자를 보도하였으며 직제학과 부제학 등을 두루 역임한다. 그는 또한 《동국정운》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신숙주는 외국어만 잘한 사람이 아니라 풍부한 독서로 교양을 쌓은 지식인이기도 했다. 1448년부터는 세자시강원필선 자격으로 세자인 문종의 대리청정에도 참여하였다.
세종 때에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 등이 조선에 당도했을 때 많은 조선의 대신들이 학문이 짧다고 무시하였다가, 막상 한강을 유람하면서 시문을 주고 받을 때는 그를 당할 자가 없어서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신숙주가 성삼문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예겸을 상대하게 되었고 신숙주는 예겸과 서로 형제의 의를 맺었다. 1451년(문종 1) 예겸이 다시 조선에 오자 그는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 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 해에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
서적 편찬
이 외에도 우리나라의 전승된 한자음을 정리하여 표준 한자음을 만들려는 목적에서 편찬한 『동국정운』을 1447년(세종 29년)에 6권으로 완성시키고 1448년(세종 30년) 출간하였다.
1448년(세종 30년) 집현전응교를 거쳐 1449년 세손강서원 우익선(講書院右翊善)으로 있을 때, 세손에게 사부를 세워 교육할 것을 청하였다.이후 세종의 명으로 윤회, 김종서 등과 함께 고려사절요, 고려사 등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고 주장한 정도전의 견해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만년에 병환이 깊어지자 집현전의 학사들을 불러서 어린 원손 홍위(후일의 단종)의 앞날을 부탁한다고 했다. 이때 세종에게 어린 원손을 부탁한다는 부탁을 들은 신하들 중에는 신숙주 외에 성삼문과 박팽년 등이 있었다. 그는 관료생활을 하는 한편으로 퇴청 후에는 글을 가르치고, 역사 관련 서적을 입수하여 이를 탐독하기도 했다. 그는 헛된 명분론 보다는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헌부 장령으로 재직 중 세종이 죽자 산릉전의 수반에 양녕대군이 천거되자, 태종 때의 득죄를 이유로 양녕대군을 탄핵하였으나 문종이 듣지 않자 계속해서 양녕대군을 탄핵하였다. 그해 말 수사헌부 집의(守司憲府執義)로 승임되었다.1451년(문종 1)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 등이 다시 조선에 오자 그는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해 직제학에 임명되었다.
수양대군과의 교류
평소 인간관계가 넓었던 그는 한명회, 권람 등과도 만나서 친분관계를 쌓았다. 당시 한명회는 개국공신의 손자였으나 경덕궁직이라는 낮은 직위에 있었고, 권람은 일찍 부모를 잃고 불우한 처지에 있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이들이 새로운 웅지를 품고 있음을 간파하고는 이들을 더욱 각별하게 대한다.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1452년(문종 2년) 사헌부집의가 되었다가, 그해부터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 경연 시독관 겸 지승문원사
(通訓大夫行集賢殿直提學知製敎經筵侍讀官兼知承文院事)로 춘추관기주관을 겸하여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종실록》은 2년만인 1454년(단종 2년) 3월에 완성되었다.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명나라의 고명에 답하기 위해 사은사를 자청했는데 이 때 한명회와 권람의 조언에 따라 신숙주가 서장관(書狀官)으로 동행하며 그를 수행했다.
수양대군 일행은 공식적인 업무가 끝나자 도성인 연경(현재의 베이징)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는 명나라 성조 영락제의 장릉(長陵)을 찾아갔다. 수양대군은 신숙주의 관리로서의 재능을 아꼈는데, 이듬해 4월 조선에 돌아온 뒤부터 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고, 결국 수양대군의 거사에 신숙주는 간접 지원의 형태로 가담하게 되었다. 1453년초 귀국한 신숙주는 상호군(上護軍) 겸 지병조사(知兵曹事)가 되었다.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
1453년 3월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그해 10월 수양대군이 한명회, 권람 등과 계유정난 거사를 모의할 때 참여하여 어린 단종의 뒤에서 실력을 행사하는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는데 동참한다. 이때 그는 수양대군에게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할 것을 건의한다. 성삼문, 박팽년, 성승 등은 수양대군을 못마땅히 여겼으나 그의 회유와 권고로 정난공신의 지위를 일단 수용했다. 그해 10월 우승지를 거쳐 계유정난이 성공하고 집현전의 학사들까지 포섭하여 반발을 무마시킨 공로로 그는 수충협책정난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 1등관에 오르고 이듬해 승정원도승지로 승진했다.
신숙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도승지의 위치에 있으면서 우부승지 권람, 동부승지 구치관과 함께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감시, 관찰하여 세조에게 보고했다. 반정 직후 그는 유언비어를 일소하는 한편, 어린 왕의 치세기간 중 일부 권신들과 재상들이 어린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정사
를 마음대로 독단적으로 행사하였으며 민심이 바로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였다며 민생을 위한 정책을 펼칠 것을 선언,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해 7월 경희전 고 동가제(景禧殿告動駕祭)의 찬례관(贊禮官)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부종묘 추향 대제(祔宗廟秋享大祭)의아헌관 이하의 관료를 포상할 때 채단초(綵段綃) 각각 1필(匹)을 하사받았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 1등에 고령군(高靈君)으로 봉군된 뒤 예문관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동년 그는 새 왕의 즉위를 알리는 책봉 주청사의 소임을 띠고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황제의 책봉 고명을 받아들고 1456년 귀국하였다. 명나라에 있을 당시 대명회통과 송서, 한서, 수서 등의 중국 역사책을 탐독하였고 중국의 문인들을 만나 시문을 주고받기도 했다.
귀국 후, 그는 세조의 책봉 고명을 성사시킨 공으로 그는 많은 양의 황금과 토지, 노비, 안마(鞍馬)를 하사받았으며, 이어 세조의 총애를 얻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그해 병조판서로 재직 중 전라남도와 다도해 해안가를 침략하는 왜구를 토벌하고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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