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 실록 기록들,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원균의 기록들
부정적 평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누가 옳은지에 관한 논의와 상관없이 조선 수군 지휘부의 분열을 의미했다.
국난의 위기에서 극심한 갈등을 빚은 두 사람 역시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시사료를 보면 당대사람들이 원균이 용장이라고 주장하나 아군 병사들과 백성들에게는 가혹하게 굴며 외적만 보면 도주하
는 장수가 용장이 될 수 있는가에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조정에 목을 보내는데 집착하고 공을 세우는데 욕심을 냈다
는 사료를 참고해보면 사실은 자기가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허풍을 떤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탐욕스럽고 잔혹함이 지나치다”라고 평가했다.
실록 기록들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을 충청 절도사(忠淸節度使)로 옮겨 제수하였다.
균이 이순신의 차장(次將)이 된 점을 부끄럽게 여기고서 절제(節制)를 받지 않으니 순신은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사
면을 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누차 도원수로 하여금 공죄(功罪)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균은 더욱 거침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어
하는 말이 모두 추악하였으며, 순신 또한 균이 공상(功狀)이 없음을 말하는 가운데 실상과 다른 한 조목이 끼어 있
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대부분 원균을 편들었으므로 마침내 모두 탄핵을 당했다.
상이 다시 비변사로 하여금 조정하게 하였는데, 단지 균은 체차(遞差)시켜 육장(陸將)을 삼고 순신은 병사로 죄책
감을 가지고 스스로 공을 세우게 하였다.
균은 서울과 가까운 진(鎭)에 부임하여 총애받는 권신(權臣)과 결탁해 날마다 허황된 말로 순신을 헐뜯었는데,
순신은 성품이 곧고 굳세어 조정 안에서 대부분 순신을 미워하고 균을 칭찬하였으므로 명실(名實)이 도치되었다.
-선수 2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2월 1일(갑진) 7번째기사 경상 우수사 원균을 충청 절도사로
옮겨 제수하다-
사신은 논한다.
위 헌공(衛獻公)이 망명했다가 위나라로 돌아올 적에 교외에 이르러 수종했던 사람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준 다음
들어오려 하자 유강(柳莊)이 말하기를
‘만일에 모두가 사직을 지켰더라면 누가 고삐를 잡고 따라갔을 것이며,
모두가 따라갔더라면 누가 사직을 지켰겠습니까.
임금께서 나라에 돌아와 사정(私情)을 쓰려 하시니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
하니, 나누어 주지 않았었다.
환시는 나라 임금의 가노(家奴)로서 녹훈한 일은 고찰해 볼 데가 없다.
원균은 주함(舟艦)을 침몰시키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가 매우 컸다.
-선조 163권,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6월 26일(신해) 2번째기사원균의 등급에 대해 의논하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한산(閑山) 싸움의 패배에 있어 수군(水軍) 제장들에 대하여 즉시 공(功)과 죄(罪)를 가려내어 법대로 처리
했어야 했는데도, 아직까지 고식적인 습관에만 젖어 위엄을 밝히는 교훈을 보여줄 생각을 않고 있다.
지금까지 한 사람의 죄도 바로잡지 않고 한 사람의 공도 포상을 하지 않고서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진 채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자는 것에 불과한데, 이에 대하여 비변사는 어떠한 소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비록 한백(韓白)4008) 이 장수가 되더라도 싸움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도원수마저도 대수롭잖은 일로 보아 한 명의 교위(校尉)라도 목을 베어 군율(軍律)을 크게 진기시키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삼군(三軍)으로 하여금 죽음을 영광으로 삶을 치욕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권징(勸懲)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산 싸움에 대하여 실시한 권징은 과연 어떠한가. 이 일은 여느 심상한 일이 아니니 서둘러 권징을 시행해
야 할 것이다.
세월이 점점 오래되고 나면 사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원균(元均)이 주장(主將)으로서 절제(節制)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적들로 하여금 불의에 기습을 감행하도록 하여
전군(全軍)이 함몰되게 하였으니 죄는 모두 주장에게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 각 장사들의 공죄(功罪)에 대해서도 신상 필벌을 행하여 군기(軍紀)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겠습
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대지 말라.”
하였다.
【이산해(李山海)와 윤두수(尹斗壽)가 그렇게 아뢰게 한 것이다. 】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
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
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 99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4월 2일(병진) 2번째기사 한산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들을 징계
하도록 하니, 비변사가 원균의 징계를 청하다-
위 1~3의 사료를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원균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정중이 말하기를 "원균이 전선을 많이 모아 바다에 침몰시키고 달아났으나, 이순신이 십여 척으로 적을 격파하
였는데, 쓰인 배는 또한 모두 위급한 상황에 임하여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장차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배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또한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명하여 상의해서 변통하도록 하였다.
『숙종실록』숙종7년(1681) 5월 3일 기사
민정중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원균과 같은 서인이었다.
숙종 시기는 예송논쟁으로 인해 서인과 남인간의 갈등의 골이 깊은 상태였음에도, 같은 서인인 원균을 비난하고 반대 당파 사
람인 이순신을 칭송하고 있다.
또 적을 막는 길은 오로지 장수다운 사람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이 장수가 되자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자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
가 없었습니다.
『영조실록』영조26년(1750) 7월 3일 기사원균이 장수가 되어서는 패전하였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어서는 승전했
으니, 장수의 잘하고 잘못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선척(船隻:배)의 낙인(烙印)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겠
습니까?
『영조실록』영조29년(1753) 2월 22일 기사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은 원균을 패장으로 이순신은 승장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수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왕명으로 이순신의 업적을 기린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하도록 했다.
이 책의 서두에는 정조의 윤음(국왕이 관인과 인민을 타이르는 내용을 담은 문서)이 실려있다.
정조는 원균을 1등공신으로 임명하여 그를 칭송한 선조를 비판하는 위험성까지 감수하여 이순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충무공전서』는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허겁지겁 도망치다 왜군에게 붙잡히자 목숨을 구걸하다 목이 베이는 비굴한 모
습으로 묘사된다.
정조 집권기에 국책사업으로 이순신을 기리는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당시 정조집권기 조정은 서인계열인 노론이 조정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같은 서인인 원균이 아닌 동인 계열의 이순신을 기리는 전서를 펴냈다는 건 당시 사람들이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의미있는 증거다.
용인의 유학 안석광이 상언 하기를,
"신의 6대조 안홍국은 힘껏 싸우다가 만력 정유년 6월 19일 안골포 앞 나루에서 한 몸을 바쳤는데,
충무공전서에는 통제사 원균과 7월 15일 한산도의 군진이 무너질 때에 같이 죽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죽은 것은 같으나 싸우다가 죽은 것과 군진이 무너져서 죽은 것은 아주 다릅니다.
뜻을 두었던 일이 이로 인하여 묻혀 버리고 공적이 이로 말미암아 없어졌으니, 삼가 바라건데 특명으로 충무공전
서에 고쳐 기록하게 해 주소서"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힘껏 싸우다가 죽은 것이나 군진이 무너져서 죽은 것이나 죽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용맹함과 비겁함은 판이합
니다.
지명과 날짜가 이처럼 서로 틀리니, 당초 책을 편집한 신하로 하여금 사적을 다시 상고해서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내각으로 하여금 공사의 문적을 다시 고증하게 한 뒤 바로잡아야 하거든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실록』영조21년(1797) 2월 22일 기사
안흥국은 보성군수로 칠전량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손인 안석광이 자신의 조상이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지, 원균과 도망치다 죽은 것이 아니라며 이충무공전서에 기록된
조상의 사적을 고쳐달라 요청했고,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내용을 수정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안석광은 자신의 조상 안흥국이 원균 같은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조정에 밝힌 것이다.
...(상략)【기효례는 일찍이 남해 현령(南海縣令)으로 이순신(李舜臣)이 적을 토벌할 때 법을 어겨 죽게 되었는데
그가 음식으로 원균(元均)에게 아첨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그런데 자헌은 그가 일가인 것 때문에 선무 공신(宣武功臣)에 수록시켰다. 】(하략)...
-광해 4권, 즉위년(1608 무신 / 명 만력(萬曆) 36년) 5월 16일(신축) 2번째기사 양사가 합사하여 기자헌·이홍로·이
진을 처벌하여야 한다고 아뢰다-
원균이 다른 이에게 뇌물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각도의 병사(兵使)에게는 본래 종사관(從事官)이 없는 법인데, 충청 병사(忠淸兵使) 원균(元均)은 전 군수(郡守)
【최덕순(崔德峋)을사신은 논한다.
최덕순은 음관(蔭官)으로서 추솔하고 비루하여 한 가지 점도 취할 것이 없다.
임진란 때 가평 군수(加平郡守)로 있으면서 우리 나라의 피난민을 죽여서 머리를 깎고 이마에 문신을 새겨 왜인의
형색을 만들어 행재소(行在所)에 거짓으로 보고하고 상공(上功)을 노리다가 여러 사람이 목격하여 정상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에게 형이 가해지지 않았으니, 통탄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대관(臺官)의 이 논란 역시 너무 가벼운 것이다.】
종사관의 명칭을 붙여 수행시킬 것을 계청하여 거느리고 갔으니,
이는 법규에 어긋나는 처사로서 지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덕순은 바야흐로 도내에 우거(寓居)하고 있다가 연줄을 이용해 간청하여 이 소임을 맡게 되었으나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열읍(列邑)에 전식(傳食)하므로 많은 폐단을 끼치고 있습니다.
원균을 추고하고 최덕순의 종사관 칭호를 없애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사는 추고할 수 없다.
칭호를 없애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선조 71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12일(기묘)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충청 병사 원균의 추고
와 최덕순의 종사관 칭호를 박탈하도록 청하다-
그외의 기록들
기록에 의하면 한산도 해전 직후 이순신에게 위임받은 패잔병 처리 임무에 실패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에 잡혀갔다 돌
아오던 조선인 여성등과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여 왜군의 목을 벤 것이라 속였다.
이후 난중일기에 의하면 두번 더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잡혀간 여자들은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이 엄히 금지시켜 되돌려 보냈는데 수사(水使:원균)가 적선
을 쳐부순 날에 배에 가득 실려있던 아이들과 여자들이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외쳤으나 듣고도 못 들은 척하고 모
두 목을 쳤다고 한다.
이로써 송서(宋瑞)의 딸과 손녀도 우리나라 사람 손에 죽은 것이 아니겠는가 -정만록-
2월 28일 [양력 3월 30일]<계축> 맑으며 바람조차 없다.
새벽에 출항하여 가덕에 이르니, 웅천의 적들은 기가 죽어 대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우리 배가 바로 김해강 아래쪽 독사이 목(禿沙伊項:부산시 강서구 명지동)으로 향하는데,
우부장이 변고를 알리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달려가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수사 원균(元均)의 군관의 배와 가덕첨사의 사후선(척후선) 등 두 척이 섬에서 들락날락 하는데,
그 짓거리가 황당했다.
두 배를 잡아 매어 경상수사 원균에게 보냈던 바,
수사 (원균)가 크게 성을 냈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본의는 군관을 보내어 어부들의 목을 찾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초저녁에 아들 염(苒)이 왔다. 사화랑에서 잤다
난중잡록에도 그에 대한 비판이 나와있다.
(상략)...나는 적을 만나 싸울 때 거리가 멀면 편전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을 쓰며,
육박전이 벌어지면 칼을 사용하고 칼이 부러지면 정(釘)으로 싸우니, 이기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총대장이나 된 자가 직접 나서서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것이 말이나 된단 말인가...(하략) -난중잡록-
백사(이항복의 호)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일찍이 수군과 육군을 지휘한 여러 장수들의 공을 논하면서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 대첩과 권율의 행주
대첩이 마땅히 으뜸가는 공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바뀔 수 없는 정론이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원균은 다만 남에 의지해서 성공한 자이니, 감히 이순신과 공을 겨룰 수는 없다"고 하였다.
백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잘못된 말을 했겠는가? 왜적이 수군을 거느리고 멀리 호남을 향해 진격해 갔을
때 이순신은 목숨을 걸고 계략을 짜내어 한산도에서 차단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6년 동안이나 서쪽으로 노를 저어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반면 원균은 겁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스스로 전설을 모두 침몰시키고는 섬으로 도망가 숨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군중으로 데려다 놓고 돈과 군량을 넉넉히 보내 주었고, 노획한 적의 머리와 포로를 원균에게 나
누어주어, 원균이 군율로 다스려짐을 면하게 했을 뿐 아니라 또 상까지 받도록 했다.
원균은 이토록 이순신에게 받은 은혜가 참으로 셀 수 없이 많았는데도,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품어 이
순신을 해치는 데 못할 것이 없었다.
이순신이 스스로 바다의 왕(海王)을 자처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고,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바다를 건너
게 되자 은밀히 장계를 올려 이순신이 겁을 먹고 출진하지 못했다고 말하여, 이순신은 체포되어 국문을 받기에 이
르렀다.
결국 원균이 그를 대신하였으나, 한시도 버티지 못하고 온 수군이 침몰하니, 목을 벨 죄만 있지 기록할만한 공은 없
는데도 도리어 이순신, 권율과 더불어 칭송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원균은 대대로 한양에서 살면서 그의 가족들이 지위 높은 대신과 인맥을 맺고 또 시국을 담당한 사람을 아첨으로
섬겨 그를 도와준 자가 많았다.
그 때문에 임금을 속이고 형벌과 상을 뒤엎은 것인데 백사는 그런 사실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어전에서 공을 논할 때 어찌하여 이를 아뢰어 우리 선왕(先王)으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명백히 알도록 하지 않았
는가?
물러 나온 뒤에 처음에는 '바뀔 수 없는 정론'이라 말하고 끝에서는 '감히 이순신과 공을 겨룰 수 없다'고 말하니,
정론이란 과연 그런 것인가? 『은봉전서』
『은봉전서』의 저자 안방준은 이항복이 더 강한 어조로 원균을 비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따지고 있다.
안방준은 경상도에서 활약한 의병장으로, 원균과 같은 당파인 서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원균과 친인척 사이였고, 현장에서 직접 활동했기에 원균에 대해 있지도 않은 험담을 지어낼 가능성은 없다.
원균은 나의 중부 동암공(안중홍)의 처 원씨의 친족이다.
그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중부를 찾아와 인사하고 말하기를,
"나는 이 직책에 오른 것이 영광스럽지 않고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값은 것이 통쾌할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중부께서
"그대가 왜적을 무찌르는데 성심을 다하여 그 공로가 이순신보다 더 뛰어나면 치욕을 씻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고작 이순신을 갈아치운 것으로 통쾌히 여기면 어찌 치욕을 씻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자 원균은
"내가 적을 만나 싸우게 되면 먼 거리에서 편전과 장전을 쓰고,
가까이에서는 칼과 곤봉을 사용하면 되니 이기지 못할 까닭이 없소."라고 하였다.
중부는 웃으며 말하기를
"대장이 되어서 직접 칼과 곤봉을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원균이 돌아가자, 중부께서 나에게 이르기를,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일을 하기는 틀렸다.
조괄과 기겁도 저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고 오래도록 탄식하였다.
남쪽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고 분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은봉전서』
이는 원균이 이순신을 몰아내고 삼도 수군통제사로 부임하기 전 먼친척 되는 안중홍을 찾아가 나눈 이야기로서 여기 나온 조
괄과 기겁은 중국 전국시대 장수로서 자신의 전임자를 몰아내고 싸웠다가 대패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상략)이순신이 남쪽으로 향하는 길에 그를 만나러 온 사람들은 한산도에 있는 원균의 행실에 대해 여러가지 이
야기를 들려주었다.
5월 8일 원균은 이순신에게 편지를 보내 조상하였다.
이순신은 그것이 원규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도원수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여겼다.
그날 이경신이 한산도에서 와 원균의 일을 전해주었다.
자신이 데리고 온 서리를 곡식 사라는 구실로 육지에 보내놓고 그 처를 사통하려 했다는 이야기.
조정에 뇌물로 올려보내는 짐이 서울 길에 잇달았다는 이야기 등이었다.(하략)...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원균에 대한 기록들
- 1593년
2월 8일.
아침에 영남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전라우수사의 기약 늦어진 잘못을 몹시 탓하며 지금 곧 먼저 떠나겠노라고 하
였다.
나는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해 안으로는 당도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 들어오므로 온 진중이 바라보고 기뻐 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2월 22일
(중략) 곧이어 진도(珍島) 상선(上船)이 또 적에게 둘러 싸여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
원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척하며 끝까지 돌아서서 구원해 내지 않았으니 그 어이없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다.
이 때문에 경상수사에게 따져 물었지만, 가히 한탄스럽다.
오늘 통분한 것은 무슨 말로 다하랴.
모두 경상수사 때문이다.
2월 23일
원 수사(원균)가 와서 보았다.
그 음흉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2월 28일
김해강 아래쪽 독사이항으로 향하는데 우부장(김득광)이 변고를 알려왔으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가서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수사 군관의 배와 가덕 첨사(전응린)의 사후선(척후선) 등 2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
면서 태도조차 수상하므로 묶어서 원수사에게 보냈던바, 수사가 크게 성을 내는 것은 그 본의가 군관을 보내어 고
기 잡는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오는 데 있었던 까닭이다.
3월 2일. 비.
종일 비가 왔다.
배 봉창 밑에 앉았노라니 온갖 생각에 가슴이 치밀어 올라 회포가 어지럽다...이영남,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 원 수사의 비리(非理)를 들으니 한탄스럽다.
5월 14일
선전관 박진종(朴振宗)과 선전관 영산령(寧山令) 복윤(福胤)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같이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내가 우수사의 배로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순배 나누고 있을 때 영남수사 원균이 와서 술주정
을 부렸는데 온 배 안 장병들로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속이고 망령됨은 말할 길이 없다.
5월 15일
아침에 낙안군수 신호가 와서 보았다.
윤동구(尹東耈)가 그 대장의 장계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 고약스러움은 말할 길이 없다.
5월 21일
원 수사가 허위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소동케 하였다.
군중에서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고약스러움을 말할 길이 없다.
5월 27일
영남우병사 최경회의 답장이 왔는데, 원 수사가 송경략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고 있다니,
매우 가소롭다.
5월 30일
원 수사가 송 경략[36]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였으나 병사(兵使)의 공문에 따라서 나눠 보내라고
하였더니, 공문을 인정하지 않는 심한 언사로 무리한 말만 많이 하니 우스웠다.
명나라 고관이 보낸 화공(火攻) 무기인 화전 1,5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독차지해서 쓰려고 하다니,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남해 기효근이 배를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는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니 가소롭다.
이 같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고도 예쁜 색시를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인 원 수사 또한 그러하니 어찌 하랴.
6월
나고야에는 10만여 왜군이 조선 출정을 대기하고 있었고,
북쪽으로부터는 16만의 왜군이 남하해 내려오고 있었지만,
기효근과 원균은 병선에 '예쁜 색시'를 태우고 다녔다.
6월 10일
새벽 2시에 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가 (적을) 치자'고 하였다.
그의 시기(猜忌)와 흉모(凶謀)는 형언할 길이 없다.
이날 밤으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6월 11일
아침에 적을 토벌할 일로 공문을 만들어 영남수사에게 보냈더니 술이 취하여 인사불성이라고 하였다.
7월 21일
경상우수사와 정 수사가 한꺼번에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 수사의 하는 말은 극히 흉측하고 말할 수
없는 흉계이다.
이러하고서 일을 같이 한다면 뒷걱정이 없을까?
7월 28일
사도첨사가 복병했을 때 잡은 보자기 10명이 왜복으로 변장해 입고서 하는 짓들이 수상하다고 하므로 자세히 추궁
했더니 경상수사가 시킨 일이라고 하였다.
곤장만 때리고 놓아주었다.
8월 2일
어두워질 무렵에 우수사가 배에 와서 전하기를
"원 수사가 허망한 말을 하며 나에 대하여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더라"고 하였다.
모두 망령된 짓이다.
무슨 상관이 있으랴.
8월 6일
저녁에 원 수사가 왔다. 이경수, 영공, 정 수사도 와서 일을 의논했는데,
원 수사의 주장에는 자주 모순이 생긴다.
한심한 일이다.
8월 7일
저녁에 경상수사의 군관 박치공(朴致公)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하였으나,
원 수사와 그 군관은 본시 헛말 전하기를 잘 하니 믿을 수가 없다.
8월 26일
원 수사가 왔다. 얼마 뒤에 우수사, 정 수사도 모두 모였다.
흥양(배흥립)이 오므로 막걸리를 대접했는데 원 수사는 술을 먹겠다고 하므로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해서 망발을 하는 것이었다.
우스웠다.
8월 30일
원 수사가 와서 영등(永登)으로 가자고 독촉한다.
그가 거느린 25척의 배는 모두 내어 보내고 다만 7, 8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쓰고 일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다.
- 1594년
2월 11일
식후에 활터로 올라가니 경상수사와 우수사 조방장도 왔는데, 같이 술에 취해 있었다.
10월 17일
어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원 수사의 속이고 무고하는 말들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참으로 해괴한 노릇이다.
- 1597년
5월 2일
진흥국(陳興國)이 좌수영으로부터 와서 눈물을 뿌리면서 원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5월 5일
늦게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이 한산에서 와서 원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도(道)와 진(陣)에 속한 진중의 장
졸들이 모두 다 (원균을) 배반하므로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5월 8일
이경신(李敬信)이 한산에서 와서 음흉한 원의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가 데리고 온 서리(書吏)에게 육지로 가서 곡식을 사오라며 내보내 놓고는 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자, 그 여자가 악을 쓰며 듣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고함을 질렀다고 하였다.(중략)
원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 탓인가.
그가 바치는 뇌물 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달아 잇고 있으면서도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고 있으니,
그저 때를 잘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5월 28일
늦게 출발하여 하동(河東)에 이르니 현감이 서로 만나보게 된 것을 반가워하면서 성 안의 별사(別舍)로 맞아들여
간절한 정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원이 미친 짓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7월 7일
오늘 칠석(七夕)을 맞으니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랴.
꿈에 원공과 만났다.
내가 원공의 윗자리에 앉아 밥상을 받는데, 원공이 기쁜 기색을 띠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박영남(朴永男)이 한산도로부터 왔는데, 그 주장[43]이 실책과 과오로 죄를 받기 위해 원수(權慄)에게 붙들려갔다
고 하였다.
7월 18일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해군이 대패했는데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 등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다"고 하므로 통곡하였다.
역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원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택당 이식(1584-1647)이 지은 시장(諡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덕수 이씨로 좌의정 이행의 현손이며 청음 김상헌과 함께 척화론(斥和論)을 펴다 심양으로 잡혀간 절신(節臣)이다.
그는 대제학을 지냈으며 한학사대가(漢學四大家)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여기서 이순신의 시호를 청하는 글에 이순신을 옹호하면서 원균을 비난하였다.
이에 앞서 원균이 배 한 척을 타고 공에게 와서 하소연하자 공이 연명으로 승첩을 아뢰곤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공의 공적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을 승진시켜 통제사로 삼았던 것인데, 원균은 공의 아래
에 있게 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이때부터 공에게 두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그런 까닭에 공이 항상 부드럽게 포용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원균은 사납게 굴고 제멋대로 화풀이를 하면서 공의 절제
(節制)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대사를 그르칠까 염려한 나머지 자신의 허물을 들어 인피(引避)하며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이를 묵
과할 수 없다고 여겨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키기에 이르렀다.
원균은 쌓인 감정을 풀지 않은 채 조정의 고관들과 결탁하고는 온갖 방법으로 공을 무함하기 시작했다
원균은 배가 볼록하고 입은 비뚤어 지고 얼굴빛은 흙빛이다. -달천몽유록-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식사에 밥 한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을 3~4마리씩을 먹으며, 평소에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한다. -난중잡록-
권율과의 관계
권율은 도원수가 되면서 이순신과 원균을 휘하에 두게 되었다.
말없이 묵묵하게 자신의 할 일만 하는 이순신은 아무 문제없이 잘 지냈으나 매일같이 불평만하는 원균과는 사소한 충돌이 많
았다.
게다가 원균은 관직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 위인이였고 이순신이 지형(암초)과 기후(역풍)의 문제로 인하여 칠천량에 출전하
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간첩 요시라의 말만 믿은 윤근수 윤두수 형제가 이순신을 모함하자 여기에 호응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하고 그 후임으로 원균이 들어오자 원균은 오히려 그 동안 해온 모
든 주장들을 번복하고 이순신이 내세웠던 주장을 그대로 내세웠다.
이 일에 대해 권율은 칠천량에 출동할 수 있다면서 출동하지 않는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원균에게 곤장을 때렸는데 권율이 원
균에게 곤장을 때린 진짜 이유는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얻으려고 감히 조정과 임금을 갖고 놀았기 때문에 이것이 너
무나 괘씸해서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린 것이다.
난중일기에서 본 원균 비판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인 난중일기에서 원균을 아래와 같이 비판했다.
朝報及元兇緘答則極爲兇譎, 口不可道. 欺罔之辭, 有難形狀. 天地間無有如此元之兇妄.
조정에서 보낸 편지와 원흉이 보낸 답장이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기만하는 말들이 무엇으로도 형상하기 어려우니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이 원균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
이다.
— 《난중일기》 을미년 (1595년) 11월 1일
난중일기 전체에 원균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 특히 휴전 기간과 백의종군 후 권율 휘하에 들어갔을 때에 집중돼 있다.
위의 인용은 2008년 충무공유사 를 해석하던 중 발견한 내용이다.
장계에서도 이순신은 지속적으로 원균을 비판했는데 각 출동에서 원균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차 : 죽은 적의 목을 베려다 아군 2명을 부상 입힘
2차 : 병력이 없어서 죽은 적의 목을 베는 임무를 맡음
3차 : 병력 부족과 훈련 부족으로 학익진에서 빠졌고, 죽은 적의 목을 베는 데 힘썼음. 경상우수영에서 공을 많이
세운 장수는 이운룡, 우치적이었지만 원균과 같이 목을 벤 기효근이 더 높은 상을 받음.
이후 한산도로 도망친 적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적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도주.
웅포해전 : 아군이 위험에 쳐했는데 무시했고 섬에 있는 조선인의 목을 베려다 이순신에게 들킴
2차 당항포 해전 : 31척 격침 전과를 모두 자기 공으로 돌림
기타
원균은 고기를 매우 좋아하고 장수답지 않게 체구가 비대했다. 원균은 엄청난 비만이였다.
이러한 원균의 체형과 무능함을 조합해서 전라남도 곡성에 사는 생원인 오천뢰(吳天賚)는 원균을 비꼬는 한시를 지었다.
한산일도 국남문(閑山一島國南門), (한산도는 나라의 남문인데,)
저사조정 역장빈(底事朝廷易將頻). (무슨 일로 조정은 장수를 자주 바꾸었나?)
불시원균 초부국(不是元均初負國), (애초에 원균이 나라를 져버린 게 아니라,)
원균지복 부원균(元均之腹負元均). (원균의 뱃살이 원균을 져버렸네.) — 《오천뢰가 원균을 평가하며 읊은 시조》
원균은 몇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원균의 경우 문집이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