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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국공주, 고국을 배척하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지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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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국대장공주, 고국을 배척하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지지하다.

 

노국대장공주 패아지근씨(魯國大長公主 孛兒只斤氏, ? ~ 1365년 3월 8일(음력 2월 16일))는 고려 공민왕의 적후(嫡后)이다. 원 순종(元 順宗·추존)의 손자인 위왕(魏王) 베이르 테무르(孛羅 帖木兒)의 딸로, 본명은 보르지긴 보타슈리이다. 공민왕이 지어준 고려식 이름은 왕가진(王佳珍)이다. 1365년(공민왕 19년)에 난산으로 사망했다. 시호는 처음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를 내렸다가 차후 원에서 내린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로 교체토록 하고, 결국 이를 합성해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로 했다. 우왕 때는 인덕태후(仁德太后)라 했다. 올바른 호칭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인덕왕후(仁德王后)로 알려져 있다. 능은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 현정릉 내에 위치한 정릉(定陵)이다.

1349년(충정왕 1년)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하였으며, 이후 공민왕이 고려로 돌아갈 때 원으로부터 승의공주(承懿公主)에 책봉되었다.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이 반원 정책을 실시하자 자신이 태어난 고국을 배척하고, 남편을 도와 공민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는 후에 겨우 아이를 갖게 되었으나, 난산으로 죽었다. 그녀가 죽자 공민왕은 매우 슬퍼했다.

그녀가 죽은 지 얼마 후 정치권을 신돈(辛旽)에게 양도했다. 공민왕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벽에 걸고 밤낮으로 바라보면서 그리워했다고 한다.

또한 공민왕은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혼제를 지냈으며, 그 진영을 모시기 위해 호화로운 영전을 짓도록 하였다. 조선의 제10대 임금 연산군은 모후인 폐비 윤씨와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공서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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