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박해, 조선 최초의 카톨릭교회에 대한 박해 사건
신해박해(辛亥迫害)는 1791년(신해년, 정조 15년) 조선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 사건이다. 신해교난(辛亥敎難) 또는 신해사옥(辛亥邪獄), 진산 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부른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조선의 해서(海西)·관동(關東) 지방의 일반 민중 사이에 신봉되고 있는 동안은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1790년 베이징 교구장인 구베아 주교가 조선 로마 가톨릭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전라도 진산군에 사는 선비 윤지충 바오로와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 야고보는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고자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1791년 여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의 유언대로 유교식 상장(喪葬)의 예를 쓰지 않고 조문을 받지 않았으며, 로마 가톨릭 예식으로 장례를 치러 종친들을 분노케 했다. 그의 외사촌이자 같은 천주교인인 권상연이 윤지충을 옹호하고 나서고, 이에 대한 소문이 조정에 전해짐으로써 이 문제는 당쟁으로 비화되었다. 당시 서학 탄압에 앞장서온 홍낙안은 좌의정 채제공에게 보낸 글에서
"저들 지충의 무리는 제사를 폐한 것도 부족하여 부모의 상을 당하고서도 혼백을 세우지 않았고 부모가 죽었음에도 조문을 받지 않으니 천지가 생겨난 이래 어찌 이와 같은 변괴하고도 사악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죄는 살인한 것과 같다"
고 주장했다.
그는 윤지충의 체포와 사형을 요구하고 나섰다. 정조는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는 노론 벽파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어, 진산군수 신사원을 시켜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산군수는 윤지충의 집을 찾아 사당에서 위패를 넣어두는 주독을 발견하고 열어보았으나 위패는 없었다. 피해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윤지충의 숙부가 감금됐다는 소식에 1791년 10월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가톨릭 신앙을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두 사람을 회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두 사람을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했다.
윤지충은 전라감사 정민시의 심문을 받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천주교를 신봉함으로써 제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야 한다 해도 저는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그렇다고 하여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또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제사를 규정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제 낮은 생각으로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 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윤지충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라 감영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전라 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두 사람에 관해 보고했으며 조정에서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임금은 처형을 윤허했다. 이로써 윤지충과 권상연은 두 사람이 사회도덕을 문란케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고 난행(亂行) 하였다는 죄명으로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차례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정조는 한편으로는 천주교 탄압을 반대하는 노론 시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천주교의 교주로 지목받은 권일신 같은 인물은 귀양 보내는 데 그치고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둘러싸고 남인 계통이면서 당시의 상국(相國)인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신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홍의호 등의 소위 공서파가 대립, 1801년 신유박해로 신서파가 결정적 타격을 입을 때까지 10여 년간 암투가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중국 천주교회는 선교사 파견을 보류하였다가, 1794년 주문모 신부를 선교사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