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게릴라 전투를 지휘하다.
김원봉(金元鳳, 189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 1958년 11월?)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며, 혁명가·정치가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1948년 4월 월북 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를 상대로 항일무장투쟁을 하였으나 실력의 한계를 느껴 이후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후 국민당 장교 신분으로 제1차 국공합작에 참여해 국민혁명(북벌)에 가담했다.
이후 군사 양성을 위해 남경군관학교의 한인 입학을 추진했고,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게릴라 전투를 지휘했다. 1935년 김규식(金奎植) 등과 민족혁명당을 창당 활동하다가 중국 국민당의 한국 독립운동단체 통합 요구에 부응, 1940년대초,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경상도 지역구)의원,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 활동하고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해방 후,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주전선, 인민공화당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김규식·김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한 뒤, 귀환하지 않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하여 정치인으로도 활동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후 국가검열성상에 임명된 뒤 노동상, 다시 국가검열성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8년 11월 연안파 숙청작업 때 숙청당했다. 호는 약산(若山)으로 그래서 김약산으로도 불린다.
가명으로 최림(崔林), 김약산, 진국빈(陳國斌), 이충(李冲), 김세량(金世樑), 왕세덕(王世德), 암일(岩一), 왕석(王石), 운봉(雲峰), 김국빈(金國斌), 진충(陳沖), 천세덕(千世德), 김약삼(金若三) 등 다양한 가명이 있다. 고모부 황상규의 문인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경상남도 밀양군 출신.
사상과 신념
김원봉은 베이징과 텐진, 상하이를 오가며 의열단 등의 활동을 지도, 지휘하였다. 그는 냉정한 성격이었고, 개인주의적이었다.
아리랑의 김산에 의하면 '그는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였으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잘 어울려 다녔지만 청년기 이후의 김원봉은 김약수, 이여성, 김두봉 등 소수를 제외하고는 별로 친하게 어울리지 않았다.의열단의 동지였던 김성숙과 조선의용대원 김학철, 최재 등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고 동지들에 대해
서는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라 한다. 그는 말을 할 때 목청을 높이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였으며, 낯을 붉히거나 음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듣는 사람에게 와닿는 말을 하였고, 담담한 가운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열정을 느끼게 했다 한다. 그는 언제나 조용히 지냈고 운동에도 잘 참여하지 않았으며 주로 혼자 사색하였다.
김산이나 김성숙 등에 의하면 그는 대부분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주로 독서를 하거나 홀로 사색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미남형인데다가 깔끔한 외모를 가졌기 때문에 여러 아가씨들이 그를 좋아하였지만 그는 아가씨들을 멀리하였다.그가 화류계에 자주 출입했다는 증언도 있다. 정화암은 그가 화류계에 출입했고 이때 얻은 병 때문에 본처 최씨와 두 번째 부인인 박차정이 죽었다고 증언하였다.
정화암에 의하면 '영웅호색이라고, 김원봉이가 원래 호색을 했거든요. 그래서 화류병에 만신창이였지요. 그래서 그 부인(본부인)이 완전히 화류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김두봉의 조카딸(박차정)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증언하였다. 장준하는 그가 젊은이들에게 술을 사서 먹이거나 미인계를 쓰기도했다고 하였다.
흥선대원군과 쇄국정책 비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반탁운동에 대해서도 이것을 흥선대원군의 쇄국양이에 비기고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격퇴시킨 병인양요(1868년)와 신미양요(1871년)는 그 나름대로 민족적, 국수주의적 견지에서 통쾌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세계 저세에서 살펴보면 민족의 장래를 그르치게 한 어리석은 짓이었다."라는 것이다.
안전과 불신
그는 안전에 대한 염려가 강하였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나 귀국 이후에나 여러 곳에 은신처를 마련해두고 암살과 테러를 피해 비밀리에 움직였다. 또한 사진 촬영 뒤에는 원판과 필름을 회수해갈 만큼 주변 관리를 깨끗하게 처리했다.
평가
1925년 동아일보자 사설란에 '합치되는 두 운동'이라는 내용을 실은적이 있었는데, 김원봉은 독립운동에 대한 노선을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운동선상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두가지 풍조가 나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근일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하여 토론한 문자도 종종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간단히 말하면, 우리 조선 사람의 처지로는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연락과 합동이 있어야 한다기 보다는 민족운동이 곧 사회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선 민중의 생존번영 자유평등을 위하여 분토노력한다는 그 실질문제에서 두가지 운동이 다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만, 하나는 형식이 종족의 투쟁으로 나타나고 하나는 계급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하여 두가지 운동의 차이점을 말할 수 있겠지요. (중략) . . . 즉, 이 두가지가 조선에서는 합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근거를 들자면 1945년 8월 광복 직후, 귀국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체류하고 있을기간 동안 일본군으로 강제징집 당했던 소위계급 황용주(뒷날 MBC사장)는 김원봉하고 오랜시간동안 얘기나눴다는데, 황용주에 의하면 '김원봉은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김일성의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회고하였다. 무장독립투쟁에서 큰 활약을 했으나, 활약에 비해 남북한 양쪽의 평가는 낮은 편이다.
김산은 그를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아나키스트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김산에 의해 묘사된 그의 모습은 웃는 법이 없었고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김규식은 '약산은 혁명가의 자질을 타고난 인물이자 지도자이지만, 정치적인 인물로는 입지를 못잡아 아쉬운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삼웅은 '일제강점기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투사'이자, '김원봉에 대해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삼웅의 말에 의하면 '김원봉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남에서는 사회주의자로 평가했지만, 그는 사회주의자와 입장을 달리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또 김일성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 후 박헌영 등 남로당을 숙청한 후 김원봉은 마지막 남은 라이벌 같은 존재였고 이 때문에 김
원봉을 배제시켰을 개연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이어 "해방 후 친일파들로부터 신변에 위협을 느껴 망명하듯 월북했는데, 이를 이유로 독립운동 서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과연 사회주의자냐 아니냐의 문제가 독립운동가의 평가에 영향을 미칠 만한 근거가 되느냐, 그리고 사회주의자면 독립
운동자체도 낮게 평가받아야만 하는 필연적 논리가 성립되느냐는 문제자체가 근본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최근 대한민국에서는 김원봉의 독립운동 경력이 인정되고 있는 추세로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다. 2005년과 2007년에는 김원봉의 여동생 김학봉씨가 김원봉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을 수여해줄 것을 신청하고, 그의 독립운동활동에 관한 공적자료를 함께 대한민국 정부에 제출했던적이 있었지만,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김원봉이 1948년 남북협상 이후 북에 잔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주요직에 있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수여를 불인정했다.
비판
일본 학도병 출신으로 강제징집되었다가 탈영하여 중국군으로 합류, 한국 광복군에 편입한 장준하는 '김원봉이 학도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인계를 썼다'고 비판하였다. 장준하는 그가 '헛된 약속으로 허풍을 떨었다'고 비판했다. 한편 김구의 측근이었던 임정내 보수세력인 석린 민필호는 '김원봉이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드는 것을 거슬리게 생각하였으며, 그를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장준하 역시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지목, 비난했다. 장준하는 '비록 그가 김규식 박사를 당수로 업고 이끌고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부당수로 있기는 했으나 이미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 사람이었다. 장준하는 그의 영입 노력 역시 비난했다. 김원봉이 자신들을 영입하려는 노력에 대해 '우리들의 중경행을 막으려는 수작을 부렸다.'고도 비판했다. 또한 장준하는 '김약산은 그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 구축해 보려고 공작을 편 것이다.'며 비판했다. 장준하는 그가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는데 참여한 것의 진심조차 의심했다. '연립정부 내각에 참여하기 위해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던 것 같다.'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의 평가
1990년대 초반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복권노력이 추진되었다. 1995년 본처 박차정이 건국훈장을 수훈하였으므로 김원봉의 건국훈장 서훈 노력도 추진되었으나, 국가보훈처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자발적 월북자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장관급 이상의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하여 2005년 건국훈장 서훈노력은 좌절되었다.
그 뒤 사단법인 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와 여천 홍범도 기념사업회(회장 이종찬), 도마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회장 함세웅) 등 항일운동기념단체 11곳이 주축이 돼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 서훈을 추진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