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다.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년 8월 15일(음력 7월 18일) ~ 1764년 8월 23일(음력 7월 26일))는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의 총관후궁이다. 본관은 전의(全義)로, 증찬성 이유번(李楡蕃)과 부인 한양김씨(김우종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보통 그의 처소를 선희궁(宣禧宮)이라 부른다.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정조의 친할머니이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 6녀를 두었다. 첫 시호는 의열(義烈)로 이후 의열궁(義烈宮)으로 불렸다가 다시 소유(昭裕)로 시호가 바뀌었다. 1701년에 궁녀로 입궁하였다. 1726년 11월 16일 영조의 승은을 입어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 1728년에 내명부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다가 마침내 1730년 11월 27일, 내명부 정1품 빈(嬪)의 첩지를 받아 영빈(暎嬪)이 되었다. 슬하에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및 조졸한 옹주 둘을 포함한 1남 6녀, 모두 일곱 자식을 두었으나, 화완옹주를 제외한 6명의 자식들을 살아생전에 모두 요절했으며 그 중 한명인 사도세자는 비참한 죽음을 겪었다.
혜순자경대왕대비는 영빈 이씨가 거처를 옮기면 왕자를 낳을것이라는 점을 보고 창경궁 집복헌으로 거처를 옮기라고 명을 내렸다. 영빈 이씨는 마침내 1735년 왕자 사도세자를 출산하였고 사도세자 출생당시 영조 역시 그녀의 곁을 직접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화평옹주와, 영빈을 닮아 미색이었다는 화협옹주는 병을 얻어 숨졌다.
고명아들인 사도세자는 애초에 아버지 영조와 사이가 멀었던 데다, 성격,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수시로 영조와 갈등했다. 이로이한 정신병을 얻어 살인과 비행을 일삼았다. 한편 사도세자에게 아들이 다섯이 태어나면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 대신 손자들 중에서 후계자를 택하려 했다.
정신적인 질환을 앓는 상태에서 자신의 후궁을 살해하고, 영조의 시해까지 운운하자 며느리와 세손을 살리기 위해 친아들의 단죄를 간하고 결국 세자는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었다. 그는 사도세자를 편들지 않고 오히려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한다.
영조는 자신의 꿈에 정성왕후 서씨가 세자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고 예지해준 적이 있다며, 사도세자 사형을 결심했을 때 법적 모친인 정성왕후의 계시와 생모 영빈의 밀고를 그 근거로 내세웠다. 막내딸 화완옹주만이 부모보다 먼저 죽지 않고 천수를 누렸으나, 젊은 나이에 어린 딸과 남편 정치달을 잃고, 말년에는 정조의 즉위와 함께 서인으로 강등된 뒤, 유배에 처해져 정처(鄭妻)로 격하되기도 했다. 자식들과 손주들(의소세손, 화완의 딸 등)의 죽음을 지켜보던 그녀는 1764년 음력 7월 26일, 사도세자가 죽은 지 2년 후 사망하였다.
영조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영빈의 장례를 후궁 제일의 것으로 하였고, 의열(義烈)의 시호를 내렸다. 뒷날, 고종 대에 이르러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자 묘(墓)가 원(園)으로 승격되며, 수경원(綏慶園)의 원호를 받았고,
시호 소유(昭裕)가 더해졌다. 칠궁에 올랐다. 처음 양주군 연희궁 대야동 미향(楊州 延禧宮 大野洞 未向, 미향은 남남서) 현재의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근처에 안장되었다가 1969년에 영빈이씨의 묘를 서오릉에 이장하였다. 그녀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은, 그녀가 죽은 1764년에 건립되어 의열묘(義烈廟) 또는 의열궁이라 불리다가 1788년 (정조 12년)에 비로소 선희궁이 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에 해당하는 곳에 있었으나, 1870년 (고종 7년) 위패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선희궁으로 되돌린 뒤, 1908년 (순종 2년) 다시 육상궁으로 옮기는 등 변동이 잦았다. 현재는 모든 칠궁이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존재하고 있다. 신교(新橋)는 신교동 70번지와 청운동 108번지를 이어주는 다리로 선희궁을 만든 후 그 동편에 새로 놓았는데 새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