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 왜란과 호란 이후 독자적인 합의기관이 되다.
비변사(備邊司)는 조선 중기 이후의 행정 관청이다. 비국(備局)·주사(籌司)라고도 한다. 비변사는 왜란과 호란 이후 의정부와 6조의 기능을 실질적으로 역으로 약화시키고 이런 이유로 묘당(廟堂)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초기부터 정치체제는 정무와 군무를 구분하여 문·무의 관직을 분명히 하고 무관은 정무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무는 민정·군정 모두 의정부가 맡아 다스리고 2품 이상의 문관이 회의하여 결정 사항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성종 때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계속되자 문관만으로는 정확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여 변경(邊境)의 사정에 밝은 종2품 이상의 무관도 참석하게 하여 문관과 군사 방략을 협의하도록 하였는데, 이들을 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이라 하였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도체찰사(導體察使)가 설치되고 다시 병조(兵曹) 안에 1사(司)를 두어, 종사관(從事官)에게 그 사무를 맡기면서 비변사라 칭하게 되었다.
당시의 비변사는 자체로는 아무 권한도 가지지 못하였으며 단지 병조의 3사 이외에 1사를 임시로 설치한 데 불과하였고, 설치 및 폐지도 도체찰사의 임명·해임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 뒤 변경 등에서 외침이 있을 때마다 편성되었던 임시 관청이었으며, 일반 관제상의 관청은 아니었다. 1554년(명종 9) 정규 관청으로 독자적인 합의기관이 되었고, 이듬해 청사(廳舍)가 설치되어 도제조·제조·낭청이 정하여졌다. 비변사의 권한은 임진왜란·이후 크게 강화되어 일반 행정도 물론 정치·경제·외교·문화 등 국내의 일반 행정도 모두 협의·결정하게 되어 의정부의 기능은 마비되었다.
임진왜란 때부터 의정부(전직 정승 포함)와 공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와 참판이 비변사의 관직을 겸하였으며, 각 군영 대장, 대제학, 강화 유수 등 국가의 중요한 관원이 비변사에 참여하였다. 그에 따라 사실상 의정부의 기능을 대신하여 행정, 국방, 인사 등이 처리되었으므로, 지나치게 확대된 기능으로 인해 존폐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비변사 기능의 확대·강화는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행정체제를 문란하게 만든다는 인식으로1864년(고종 1) 의정부와 비변사의 업무 한계를 규정하여 외교·국방·치안 관계를 제외한 모든 사무를 의정부에 이관하였고 이듬해 비변사는 폐지되었다. 비변사의 관제는 《속대전》에 따르면, 도제조는 정 1품으로서 현직 및 전직의 의정(議政)이 겸임, 제조는 종 2품 이상으로 일정한 정원은 없었으나 이·호·예·병·형조의 판서, 훈련대장·어영대장·개성유수·강화유수·대제학이 보통 겸임하였다. 제조 중 4명은 유사당상(有司堂上), 8명은 팔도구관당상(八道句管堂上)을 겸임하였으며, 부제조는 정3품으로 정원은 1명, 낭청은 종 6품으로 정원은 12명이었다. 그 뒤 《대전통편》에서 금위대장(禁衛大將)·수어사(守禦使)·총융사(摠戎使)는 제조를 겸직하도록 새로운 규정을 세웠다. 비변사에서 논의된 중요 사항을 기록한 《비변사등록》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