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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세종대왕이 아끼던 조선전기 최고의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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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세종대왕이 아끼던 조선전기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蔣英實, 1390? ~ 1450?)조선 전기의 관료이며 과학자, 기술자, 발명가이다. 경상남도 동래군 출생. 본관은 아산. 시조 장서의 9대손으로 추정된다.세종실록에선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는 원나라 유민의 소주(쑤저우)·항주(항저우) 사람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는데, 기술이 뛰어나 세종이 아끼었다고 설명한다. 전몰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산 장씨 종친회의 주장에 따르면 출생은 1385~1390(고려 우왕 11~공양왕 2)경이다. 또한 장성휘는 시조 장서의 8세손으로 고려 말 전서였으며 어머니는 동래현 관기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어머니와 장영실은 조선 관노로 전락하였다고 주장한다. 장영실은 동래현 관청에서 일하는 노비가 되었으며, 발명가인 장영실의 훌륭한 재주를 세종대왕이 인정하여 발탁하였다. 세종대왕은 발명가라는 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용주의자였다.

세종은 장영실을 1421(세종 4)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다. 귀국 후 장영실 나이 약 34세 때인 1423(세종 5)에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고 다시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되었다. 그 후, 세종 대왕의 명에 따라 1432부터 1438까지 이천(李蕆)의 책임하에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자격루(일명 보루각루, 1434)옥루(일명 흠경각루, 1438)를 만들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이때 제작된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로 흠경각(欽敬閣)을 새로 지어 그 안에 설치했다. 이때 만들어진 천문 기구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 기기인 대간의(大簡儀), 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방향을 가리키는 정남일구(定南日晷), 혜정교(惠政橋)종묘(宗廟) 앞에도 설치한 공중시계인 부일구(仰釜日晷),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규표(圭表) 등이 있다.

이러한 공으로 1433(세종 15)에는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하였다. 1434(세종 16)에는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다. 갑인자는 약 20여만 자에 달하며 하루에 40여 장을 찍을 수 있었다. 천문기구 제작이 끝난 후에도 장영실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생활을 하다가 나이 약 53세였던 14423(세종24), 세종이 온천욕을 위해 이천을 다녀오던 중 기술자로서 정3품 상호군(上護軍) 장영실이 책임을 지고 있던 세종대왕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이를 장영실의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의금부에서 책임을 물어 곤장 100대와 파직을 구형했으나, 임금이2등을 감해 주었다고 한다. 이후 장영실의 기록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한편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아산 장씨 시조인 장서의 묘 바로 아래에 장영실의 가묘가 있다. 장영실은 당시 세종대왕이 직접 재능이 뛰어나다고 극찬하였고, 수많은 기기를 제작하였다. 미천한 신분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종3품관 대호군(大護軍)에서 정3품관 상호군(上護軍) 이라는 관직까지 이르렀다. 장영실은 이순지이천 등과 함께 조선 전기 당대의 훌륭한 최고의 과학자로 지금도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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