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준경, "죄는 중하나 또한 공도 적지않다."
척준경(拓俊京, ? ~ 1144년 음력 2월)은 고려 중기의 무신, 정치인, 군인이며, 황해도 곡주(谷州: 황해북도 곡산군) 출신이다. 1104년(숙종 9)부터 1109년까지 윤관, 오연총, 왕자지 등과 함께 함경도에 침입한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쌓는데 기여하였다. 뛰어난 용맹으로 여진족 정벌에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나, 이자겸(李資謙)과 함께 전횡을 일삼아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곡산 척씨(谷山拓氏) 가문의 시조이며,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척위공(拓謂恭)의 아들이다.
척준경은 인종(仁宗)이 등극한 후 권력을 잡은 이자겸을 돕게 되며, 이유는 명확치 않으나, 이자겸의 다섯째 아들인 이지원(李之元)이 척준경의 사위인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자겸은 척준경을 자기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준경의 딸을 자기의 아들과 혼인시켜 사돈지간이 되자고 권고했고, 척준경은 이자겸의 제안을 수용한다. 이자겸의 권세가 커짐에 따라 척준경의 위상도 높아졌으며, 동생 척준신과 아들 척순(拓純) 역시 벼슬이 높아졌다. 척준경은 인종 초에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라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병부상서로 병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그의 동생인 척준신이 병부상서로 승진한다. 인종은 이자겸이 분에 넘치는 전횡을 일삼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1126년(인종 4) 음력 2월 지록연(智祿延) 등이 인종의 뜻을 받들어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거사하여 궁궐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척준신과 척순도 살해당하고 궐 밖으로 시체가 던져졌다.
인종의 이자겸, 척준경 제거 기도
1126년 음력 2월, 인종의 측근인 내시지후(內侍祗侯) 김찬(金粲)과 내시녹사(內侍綠事) 안보린(安甫麟)이 동지추밀원사 지녹연(智祿延)에게 이자겸·척준경(拓俊京) 등을 주살할 것을 모의하고 인종에게 이를 상주하자 인종은 동의한다. 그러자 지녹연(智祿延)은 바로 상장군(上將軍) 오탁(吳卓)과 대장군(大將軍) 권수(權秀), 장군(將軍) 고석(高碩) 등을 은밀히 불러 이자겸을 체포하도록 계획을 세운다.이들 무장들은 병권을 쥐고 있던 척준경과 그의 동생 척준신을 매우 싫어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자겸이 권력을 독식하면서 척준경 역시 권좌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척준경의 아우 척준신은 오탁, 권수의 부하 장수로 있다가 형의 배경에 힘입어 그들의 상관인 병부상서에 올라 있었다. 따라서 이를 못마땅해 하고 있던 무장들은 척준경과 척준신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그때 마침 지녹연(智祿延)이 이자겸을 체포해 달라는 부탁을 했던 것이다.
1126년 2월 25일 어둠이 내릴 무렵 인종의 명을 받은 최탁과 오탁, 그리고 권수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진입한다. 지녹연, 상장군 오탁, 대장군 권수, 장군 고석 등은 더불어 거사하여 대궐을 장악하여 척준경의 아우인 병부상서(兵部尙書) 척준신(拓俊臣)과 척준경의 아들인 내시(內侍) 척순(拓純)을 죽이고 시체를 궐 밖에 버렸다. 이외에도 지후 김정분, 녹사 전기상, 최영 등도 함께 제거하였다. 그러나 내직기두 학문이 성벽을 타고 넘어가 중랑장 지호를 통하여 이자겸에게 이 사건을 보고하였다. 최탁 등의 공격 소식을 접한 이자겸은 척준경에게 자신의 아들 의장이 거느리고 온 현화사의 승려 3백여 명을 이끌고 궁성을 포위하도록 명하였다.
출병과 궁궐 장악
척준경과 이자겸, 이자겸의 아들 이지미 등은 사태를 접하고 처음엔 매우 당황해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급히 측근세력으로 구성된 조정 백관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해결책을 모의한 끝에 척준경의 말에 따라 반격을 가하기로 했다. 척준경은 시랑 최식, 지후 이후진, 녹사 윤한 등에게 수십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궁성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이미 의장이 거느린 승려 3백명이 개경왕궁에 도착해 있었고 이들과 함께 궁궐을 공략한다. 척준경의 명령을 받은 소장들은 궁성에 도착하자 자물쇠를 부수고 성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고함을 지르며 반군들에게 항복을 종용했다. 그러나 궁성병력은 그들의 숫자가 많은 줄 알고 문을 걸어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2월 26일 아침 이자겸은 척준경을 직접 파견했다. 척준경은 비로소 자신의 동생 척준신과 아들 척순의 시체를 발견하고 복수를 다짐했다. 그는 군졸을 불러모아 최탁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고 궁성을 포위할 것을 명령했다. 여기에 승려 의장이 이끄는 헌화사 승병 3백여 명도 가세했다.
불현듯 신봉문 위에 인종이 황색 양산을 펼쳐보이며 나타나자 척준경은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왕이 이미 역도들에게 붙잡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척준경의 군사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던 것이다.
왕이 수하를 시켜 병졸들에게 '너희들은 왜 무기를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다. 이에 병졸들은 척준경에게 들은대로 "적이 궁중으로 침입했다고 해서 사직을 수위하려고 왔을 다름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인종은 그 대답을 듣고서 자신은 무고하니 무장을 해제하고 물러가라고 명령하고 내탕고를 열어 은과 비단을 꺼내 성 위에서 달아내렸다. 그러나 결국 척준경 군사는 왕궁을 장악했고 인종은 무장해제를 명했지만 병사들은 듣지 않는다.
뜻밖의 사태에 이자겸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나 척준경은 군사를 모아 대궐로 가서 위세를 보이자 오히려 거사한 지록연 등이 위축되어 대궐을 지키기만 했다.
인종은 친히 나와서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해산하게 하고 재물을 하사했으나, 척준경은 성을 내며 대궐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지록연이 이끄는 군사가 밤에 공격해올 것을 우려하여 대궐의 전각에 불을 지르고 공격했다. 이 와중에 화살이 인종이 있는 자리까지 날아가 수비군들이 방패로 가려 막기도 했다. 이자겸과 사돈인 척준경이 앞장서서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공격했으며, 출가한 아들 의장(義莊)도 현화사(玄化寺)의 중 3백을 이끌고 이자겸, 척준경이 이끌고 온 군사들과 합세하였다. 이자겸의 군사가 궁궐을 장악하자 이자겸은 인종에게 난을 일으킨 자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인종은 듣지 않았다.
궁궐 방화 사태
궁궐을 장악한 이자겸은 합문지후 최학란과 도병마사 녹사 소억을 궁문 밖까지 보내서 인종에게 다분히 협박조로 궁중에서 변란을 일으킨 자들을 내보내지 않으면 궁중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인종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이자겸은 척준경과 협의하여 궁성 공격을 명령했다.
척준경에게 공격을 지시했으나 군사가 들어가지 못했고, 이에 척준경은 화공으로 공격한다.
전투 경험이 많던 척준경은 밤이 되면 오히려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날이 어둡기 전에 대대적인 공격을 펼치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라고 말했고, 이자겸은 그의 의견을 따랐다. 척준경은 화공을 하기로 작정하고 동화문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러자 바람에 불꽃이 날려 삽시간에 내침까지 불길이 번졌고, 궁인들은 혼비백산하여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궁성 병력들도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불길은 밤까지 계속 타올랐고, 궁성 내의 병사들은 불길과 연기를 피해 밖으로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척준경은 병력을 이끌고 궐문 앞에 대기하면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이 나오자 척준경은 궁성을 빠져나오는 사람은 무조건 죽이라고 명령하고 수하들로 하여금 각 성문을 지키게 하였다. 척준경의 화공으로 패색이 확연해지자 궁성 병력을 이끌고 있던 오탁은 인종을 호위하여 서문으로 빠져나가고, 나머지 병력은 밀어닥친 척준경의 병력과 싸우다가 체포되거나 전사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보이지 않자 척준경은 추격대를 따로 편성하여 오탁 등의 뒤를 쫓게 한다. 또한 인종을 인도하던 오탁은 척준경이 보낸 낭장 장성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최탁, 권수, 고석 등의 장수들도 모두 척준경이 보낸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궁성 병력에 가담한 대장군 윤성, 장군 박영, 좌복야 홍관 등도 살해되었다.
인종은 불길이 계속 번지자 어쩔 수 없이 신하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는데, 이때 척준경은 거사에 가담한 장군들과 문관들을 죽였다. 이자겸은 강압적으로 인종의 거처를 자신의 집으로 옮기도록 했으며, 이 일 때문에 이자겸과 척준경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척준경에 의해 궁성병력이 모두 제압되었을 때 궁궐 내부는 완전히 전쟁터와 같았다. 궁궐의 대부분은 불타 없어지고, 산호정, 상춘정, 상화정과 같은 정자들과 제석원 행랑 수십 간만 겨우 남아있을 뿐이었다. 궁궐을 장악하였으나 왕이 있는 곳을 방화했다 하여 그는 계속 비판을 받게 된다.
이자겸과의 갈등
이자겸은 왕과 같은 권한으로 행동하면서, 인종을 자신의 사택인 중흥택 서원에 연금해버리고 모든 정사를 자신이 주관하며 결제했다. 그러나 인종은 다시금 이자겸을 축출하기 위해 내의원 최사전과 모의하고 척준경과 이자겸을 이간질시키기로 작정한다. 그런데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李之彦)은 척준경이 궁성에 활을 쏘고 불을 지른 사실을 비난하였다. 그러한 때에 국왕은 척준경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자겸을 제거하여 공을 세울 것을 종용했다. 그 후 이자겸이 노골적으로 왕위를 노리기 시작하자 이자겸 일파를 제거할 방안을 찾던 인종은 최사전(崔思全)의 말에 따라 척준경을 이자겸에게서 떼어내 이자겸의 군사적 기반을 제거하려 했다.
척준경은 최사전의 말에 설득되었으며, 얼마 후 이자겸의 셋째 아들인 이지언(李之彦)의 종이 척준경의 종에게 궁궐을 불사르고 인종에게까지 화살을 날린 것이 죽을죄라고 비난하자 성을 내며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인종은 척준경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보낸다.
"오직 나의 불찰로 흉악한 자들이 일을 저지르도록 방치함으로써 대신들에게 근심과 수고를 끼쳤다.
이것은 모두 나의 죄이다.
이제부터 스스로를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신민들과 함께 교화를 새롭게 할 것을 맹세하노라.
그대는 더욱 수신에 힘쓰고 기왕의 일은 다시생각하지 말 것이며, 성심껏 나를 보좌하여 후환이 없도록 하라."
이 조서를 받고 척준경은 은근히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원래부터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스런 인물이었기 때문에 왕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그때 마침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집사가 척준경의 집사와 시비가 붙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떤 일로 싸움을 벌인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상전을 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지언의 집사가 홧김에 '너희 상전은 임금이 있는 자리에 대고 활을 쏘고 궁중에 불을 질렀으니 그 죄는 죽음을 면치 못할 터이고, 너도 마땅히 관노로 글려가야 될 터인데 감히 네놈이 나를 욕해!" 이 말이 곧 척준경의 귀에 들어갔고 척준경은 이자겸의 집으로 달려가서 따지며 의관을 벗어던져 버렸다. 척준경측의 불만이 심해지고 이자겸 측에서는 사과를 거부하자 인종은 사람을 보내 이들의 갈등을 부채질했다.
상경과 출병
난처한 입장이 된 이자겸은 이지미와 이공의를 보내 화해를 요청했으나 척준경은 욕지거리를 쏟아놓으며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했다. 인종이 이 소문을 듣고 다시 추밀원사 김부일을 그에게 보내 제 위치로 돌아가 일을 보라고 권유하며 안장을 끼운 말을 한 필 선물로 보냈다. 그리고 밀지를 내려 왕실을 위해 충성을 다하려면 이자겸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회유하였다. 인종의 친필을 받고 그는 감격한다.
이자겸이 아들들을 보내 화해를 청했으나 척준경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때마침 인종이 김부일과 최사전으로 하여금 이자겸 제거를 재촉하자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하고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올렸다. 이자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을 독살하려고 하자 이 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드디어 왕에게 충성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왕의 친서를 받은 척준경은 인종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감지하고 장교 7명과 관노 20여 명을 인솔하려 궁궐로 향했다. 그때 이들은 무기가 없어 목책나무를 몽둥이 삼아 뽑아든 채로 달려가고 있었다. 결국 척준경은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바치고 바로 상경했고 이자겸은 그가 도착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환관 조의의 인도로 그들이 궁으로 들어가자 순검도령 정유황이 군사 1백여 명을 이끌고 군기감으로 들어가서 갑옷과 병기를
꺼내 나누어주고 연경궁으로 향했다. 이때 척준경은 이자겸의 수하인 소경 유원식을 만났는데,그가 이자겸에게 알릴 것을 염려한 조의는 유원식을 살해하였다.
이자겸 제거
1126년 음력 5월 척준경은 궁궐로 들어가 인종을 호위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자겸의 군사들이 저항했으나 척준경의 위세에 눌려 간단히 제압되었다. 이어 김향(金珦)·이공수와 더불어 대궐로 들어가 이자겸의 군사들을 제압한 다음 이자겸을 불러냈다. 그러나 도성에 척준경이 도착한 줄을 생각하지 못한 이자겸은 계속 정사를 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척준경은 인종을 안전한 군기감에 데려다 놓고 수하들로 하여금 호위하도록 한 다음 승선 강후현을 파견하여 이자겸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대세가 기울었음을 안 이자겸은 소복 차림으로 인종 앞에 나온 후 곧바로 옥에 갇혔다가 영광으로 유배되어 훗날 귀양지에서 사망했다. 척준경은 이자겸과 그의 처자들을 모두 팔관보에 가두고, 그를 호위하고 있던 장군 강호와 고진수를 죽였다. 또한 병사들을 풀어 그의 잔당들을 모두 잡아들이거나 죽이고, 왕을 다시 궁으로 모셔갔다. 인종은 척준경의 공을 표창하고 위사공신(衛士功臣)의 칭호를 내렸다. 또한 문하시중으로 삼으려 했으나, 척준경은 이를 사양하였다.
동년 6월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에 녹훈되고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에 임명되고, 상주국에 녹훈되었으며 부인 황씨는 제안군대부인에 봉해진다. 또한 인종이 갑자기 꿈을 꾸자 척준경은 임씨 성을 가진 왕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예언이 적중하여 인종은 문하시중 임원후의 딸 공예왕후를 간택하여 왕비로 삼았다.
그해 음력 11월 인종은 척준경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공신당에 걸게 했다. 그러나 척준경의 위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척준경이 이자겸을 제거한 공을 내세우며 권세를 부리려 하자 인종은 척준경을 꺼리게 되었으며, 마침내 정언(正言) 정지상이 척준경의 옛 죄를 들어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자 1127년 음력 3월 암타도(巖墮島)로 귀양 가게 되었다.
말년과 죽음
1127년 음력 3월 "이자겸을 제거한 일은 일시의 공이나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의 죄"라는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암태도로 유배되었다가 곡주로 이배되었다. 인종은 1128년 음력 4월 이자겸을 제거한 공을 참작하여 척준경의 귀양지를 암타도에서 고향인 곡주로 옮기게 하였으며, 1130년 음력 10월에는 "죄는 중하나 또한 공도 적지 않다" 하며 가족들과 한곳에 살도록 했다. 또한 1132년 음력 11월에는 척준경의 아들에게 직전(職田)을 돌려주게 하였다. 1144년(인종 22) 음력 2월 인종은 척준경을 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에 임명, 바로 상경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등창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인종은 그의 관작을 회복하고, 자손들에게도 출사길을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