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천왕, 진대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을 구휼하다.
고국천왕(故國川王, 119년?~197년, 재위: 179년~197년)은 고구려의 제9대 군주이다. 신대왕의 둘째아들로 휘는 남무(南武)이다.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다른 이름으로 이이모(伊夷模)가 기록되었다. 제8대 신대왕(新大王)의 둘째 아들이며, 신대왕이 죽은 뒤 형인 발기(拔奇)를 제치고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7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79년에 즉위하였다. 신대왕(新大王)의 맏아들 발기(拔奇)가 불초하였기 때문에 둘째 아들인 남무가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고 한다.
고국천왕은 키가 9척(尺)이고 겉모습이 크고 위엄있었다고 한다. 180년에 제나부(堤那部) 우소(于素)의 딸 우씨(于氏)를 왕후로 삼았다. 184년에 후한(後漢)의 요동(遼東) 태수가 쳐들어와 동생 계수(罽須)를 보내 막았으나 패배하였다. 이에 왕이 직접 출병하여 좌원(坐原)에서 한군을 격퇴하였다.
190년 가을, 왕후의 친척인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 (沛者) 어비류(於卑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가 권력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자 왕이 이를 벌하려 하였다. 이에 좌가려 등이 사연나(四椽那)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191년 4월에 수도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여 진압되었다. 반란을 진정시킨 뒤 그해에 왕은 평민 출신의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고 국상(國相)에 임명하였다.
구신(舊臣)들이 신진 세력인 을파소를 참소하자 왕은 “국상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할 것이다.”라고 포고하였다. 이에 을파소는 왕의 정성에 감동하여 정치에 힘써 나라가 융성하였다.
194년에는 진대법(賑貸法)을 제정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197년에 사망하였으며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장사지냈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다른 이름으로 이이모(伊夷模)가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지(三國志)》를 비롯한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이이모는 산상왕(山上王)의 이름이다. 《삼국지》의 기록에는 고국천왕의 기록이 없고, 신대왕(新大王)의 뒤를 이어 산상왕 이이모가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따라 고국천왕 자체의 실존 여부에 의문을 표하는 주장도 있으나 중국 측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삼국사기》의 고국천왕 원년에 등장하는 발기(拔奇)의 모반 기록 역시 산상왕 시기의 발기(發岐) 모반 기록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의하면 발기(拔奇)와 발기(發岐)는 동일인물로서 산상왕 시기에 모반을 일으킨 발기(發岐)의 기록이 고국천왕 원년에 모사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