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원효(元曉, 617년 ~ 686년 4월 28일(음력 3월 30일), 경상북도 경산시)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淨)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담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고,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명은 설사(薛思)이나, 보통 한국에서는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로 불린다.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중시조인 설총의 생부이며, 한국불교 최초의 깨달은 스님, 한국 최초의 대처승으로도 유명하였다. 원효는 신라의 귀족으로 본명은 설사(薛思)이다. 신라의 개국공신이자 박혁거세를 추대한 사로 6촌의 촌장 중의 한사람인 설거백 또는 설호진의 후손 으로, 설곡(薛嚳)의 4대손이다.
원효는 잉피공의 손자이자 내마(乃末) 설담날(薛談捺)과 조씨(趙氏)의 둘째 아들로 상주(湘州) 경산현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의 사라수 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할아버지 잉피공의 집이 금성에 있었으므로 금성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의 어머니 조씨가 그를 수태했을 때, 꿈에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드는 것을 보고 원효를 임신하였으며 만삭(滿朔)이 된 몸으로 압량군(押梁郡)의 남불지촌(南佛地村) 율곡(栗谷) 마을을 지나다가 사라수(沙羅樹) 아래 이르러 갑자기 낳았는데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그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한다. 어머니가 태기가 있어 이미 만삭인데, 출타했다가 마침 집에 돌아오던 중 불지촌 율곡 고개에 있는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산통이 있어 해산하였다. 급한 일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나무 밑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이 때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지냈기 때문
에 이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했다.
원효가 태어난 곳의 밤나무의 밤은 크기도 크고 굵으며 맛이 특이하여 사라율(裟羅栗)이라 불렀다.할아버지 잉피공(仍皮公)은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 중기 김부식과 일연이 살던 시대까지도 경주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원효에게는 형제가 몇명 있었는데,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족보에는 그의 형 중 1명인 설을신(薛乙臣)의 이름이 현재 전한다. 원효는 후일 유명한 승려가 된 뒤, 자신이 태어난 곳의 집을 희사(喜捨)해서 법당을 세우고 그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또 사라수 밤나무 근처에도 법당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이름했다.
어려서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으로 불렸으며, 또다른 이름은 모(毛)였다. 뒤에 이름을 사(思)로 정하였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났으며,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는 일찍이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유교를 가르치는 태학에 입학하였다.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부친 담날과 조부 잉피공의 기대를 받으며 화랑으로 활동하였으나, 15세 때 또는 28세 때 어머니 조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해 오래 고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황룡사(黃龍寺)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게 했으며,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沙羅寺)라 하였다. 그가 출가를 결심했을 때 아버지 설담날과 할아버지 잉피공의 실망이 대단하였다 하며, 그에게는 형 설을신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출가를 반대하였으나, 그의 뜻이 확고하자 허락하였다.
영취산(靈鷲山)의 낭지(郎智), 흥륜사(興輪寺)의 연기(緣起)와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보덕(普德) 등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으니 뛰어난 자질과 총명이 드러났다. 34세 때인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러 가다가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군(국경
경비대)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받았다가 풀려났다.
661년(문무왕 1년)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당항성 근처의 한 무덤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다시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이 없도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부처님 말씀에 삼계(三戒)가 오직 마음뿐이라 한 것을 어찌 잊었더냐?"
라는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한다.
그 뒤 분황사에 있으면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 를 제창하며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기에 노력했다. 분황사(芬皇寺)에 주석하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저술하다가 화엄경소의 제4 십회향품(十廻向品)에서 절필(絶筆)하다.(삼국유사4)
하루는 마음이 들떠 거리에 나가 노래하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라고 하니 사람들이 듣고 그 뜻을 몰랐으나, 태종무열왕이 이를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슬기로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此師殆欲得 貴婦産賢子之謂 爾國有大賢 利莫大焉)"라며 요석궁의 홀로된 둘째 공주—흔히 요석공주—를 짝되게 하니, 과연 공주가 아이를 배어 설총 을 낳았다.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이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금성시내에서 춤추며 노래부르는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시내로 나가 원효를 찾자,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관리를 만났는데, 그가 자발적으로 혹은 관리가 떠밀어서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이후 무열왕은 공주에게 옷을 말리고 쉬게 하도록 명을 내려 원효와 공주를 맺어주었다.
고려의 승려 일연은 설총이 한국 유교의 시조라 하여 '지금(일연이 살던 당시)도 우리 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傳受)해서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스스로 실계(失戒)한 원효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면서 속세의 복장을 하고 마을에 나다니다가 우연히 한 광대가 괴상한 박을 가지고 춤과 만담을 벌이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물건을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에서 '무애'를 따라가 박의 이름을 짓고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세상 사람 중 염불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그정도로 컸다. 그러나 원효의 춤과 노래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광대들이 생계에 지장있음을 호소하자 그는 이를 그만두었다.
원효는 불교 뿐만 아니라 도가와 유가에도 밝았고, 한비자와 상앙의 법가 사상에도 지식이 많았다. 특정한 스승 없이 영취산의 낭지, 고구려의 보덕, 항사사(현 오어사)의 혜공 등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원효는 당시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34세와 45세 때 의상과 함께 두 번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다. 두 번째 구법 여행 중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원리를 깨달아 구법행을 포기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 후 원효는 과부였던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설총을 낳고, 불교를 민중화시키고, 분열된 국민정신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원효는 당시 전하던 거의 모든 경론(經論)에 대해 주석(註釋)을 하여 100여 종의 저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20부 22권뿐이다. 이 중 《대승기신론소》 2권, 《금강삼매경론》 3권, 《십문화쟁론》 2권 등은 원효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원효 사상의 핵심인 일미(一味) 화쟁(和諍)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원효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유식학(唯識學)이나 불교논리학 등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그는 한국의 무속신의 하나로도 숭배되는데, 그 자세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해골의 물을 마신 것을 죽음을 극복한 것으로 보는 것으로 추정한다.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70세 되던 해 음력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사망했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