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물 마립간, 내물왕, 김 씨의 왕위 계승이 확립되다.
내물 마립간(奈勿 麻立干, 344년 ~ 402년, 재위: 356년 ~ 402년) 또는 내물 이사금(奈勿 泥師今)은 신라의 17대 임금으로, 내물왕(奈勿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 씨이고, 구도(仇道) 갈문왕의 자손으로, 아버지는 13대 미추 이사금의 동생인 각간 김말고(金末仇)요, 어머니는 유례 부인 김씨(休禮夫人 金氏)이며, 왕후는 보반부인이다.
보반부인이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신뢰하기 어렵다. 다른 이름은 나물(那勿), 나미(那密)이다.내물 이사금 재위 시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석씨 가문의 홀해 이사금에 이어 김 씨인 내물 이사금이 등극함으로써 이후 김 씨의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 이는 왕권이 강화되고 안정되어 여타 집단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하였다.
대외관계
백제
366년 음력 3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동맹을 맺었으며, 368년 봄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명마 두 필을 보내왔다. 373년 백제의 독산 성주가 3백 명의 주민과 함께 투항해오자, 내물 마립간은 이들을 받아들여 진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이에 근초고왕의 항의가 있었으나 내물 마립간은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고구려
392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왔으며, 고구려의 세력이 강성해져 내물 마립간은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399년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의 연합 공격을 받은 내물 마립간이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광개토왕은 5만 군사를 보내 가야와 왜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안에 머물기도 하였다.
주변국의 잇단 침공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내물 마립간이 몸져눕자 401년 고구려는 볼모로 와있던 실성을 돌려보내 왕위를 잇게 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고구려를 통한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며 차차 발전을 하게 되었다.
왜(倭)
내물 이사금 때에는 신라의 해안가에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364년 음력 4월 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토함산 아래에 허수아비 수천 기를 세워 신라 군사로 위장하고 들녘에 용병을 매복시켜놓았다.
토함산에 신라 군사가 많은 것으로 믿은 왜군은 곧바로 직진하여 들녘으로 향했으나 신라 복병의 뜻하지 않은 공격을 받고 대패하여 달아났다. 393년 음력 5월 왜인이 다시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포위를 풀지 않았다. 군사들은 마립간에게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지만, 마립간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왜군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농성하여, 마침내 왜군이 퇴각하자 2백 기병으로 퇴로를 막고 보병 1천을 내보내 협공함으로써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진(前秦)
381년, 위두(衛頭)를 중국의 진(351년~394년)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진의 황제 부견(재위 357년~ 385년)이 묻기를 "해동의 사정을 말하매 언어가 예전과 다르니 어찌 된 일인가?" 하는데 위두가 답하기를 "이는 중국과 동일한 현상이라, 시대가 바뀌며 말과 이름이 변하니 오늘의 말이 어찌 예와 같겠는가?"하였다.
죽음
400년 신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45년 10월 왕의 어마(御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울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이사금도
신라는 볼모까지 보내며 고구려와 제휴하였고, 고구려와의 항쟁에서 열세에 있던 백제는 신라와 경쟁관계였던 가야를 부추겨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왜의 소국들을 동원해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게 하였다. 잇단 천재지변과 왜의 침략으로 국력이 소진된 신라는 남천 가에서 크게 패하고 가야와 왜의 연합군에게 서라벌까지 함몰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다급해진 내물 마립간은 백제와의 전쟁을 위해 평양에 진주해 있던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해 그의 도움으로 겨우 가야와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고구려 덕에 신라는 오랜 숙적 가야를 패퇴시키고 낙동강 하구에 이르는 지역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한동안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주변국의 잇단 침공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몸져누운 내물 마립간은 402년 5월에 붕어하여 첨성대 서남쪽으로 그의 능이 조영되었다. 신라 후기에는 그의 방계 후손들이 왕위를 잇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