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경왕후, 7일의 왕비, 반정세력에 의해 폐위되다.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1487년~1557년 12월 27일(음력 12월 7일))는 조선 중종의 정비(正妃)이다. 시호는 공소순열단경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이다. 익창부원군 신도공 신수근(愼守勤)과 청원부부인 한씨(淸原府夫人 韓氏)의 딸로, 본관은 거창이다.
조선의 역대 왕비 중 제일 짧은 7일의 재위 기간을 보유하고 있으며, 역적의 딸로 연좌되어 폐출된 후 영조 때에 부모와 함께 복위되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위치한 온릉이다.
1487년 2월 7일(음력 1월 14일)에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태어났다. 1499년(연산군 5년) 13살의 나이에 당시 진성대군에 봉해져 있던 중종과 결혼하여 부부인(府夫人)이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인 데다가 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관계로, 1506년(중종 원년) 9월 25일(음력 9월 9일)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왕위에 앉힌 반정세력에 의해 7일 만에 폐위되었다.
그녀가 폐위된 후 새로이 중종의 왕비가 된 장경왕후가 1515년 사망하자, 담양 부사 등이 그녀의 복위를 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복위를 반대하는 중신들에 의해 복위되지 못하였다. 훗날 단경왕후의 복위를 간한 사람들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야사가 전해져 온다.
중종의 임종 직전에는 신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종실록 등에는 그녀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폐위된 이후 중종기에 그녀의 처우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어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인종이 즉위하여 그녀가 거처하는 곳에 폐비궁(廢妃宮)이라는 이름을 주고 생활에 보조를 하기 시작했다.
1557년(명종 12년) 12월 27일(음력 12월 7일)에 71세의 나이에 사망하자 왕후 시부모의 예에 따라 이등례(二等禮)로 초상을 치렀다.
그녀는 계속해서 시호도 없이 폐비 신씨 혹은 신비(愼妃)라고 불리다가, 영조 때인 1739년(영조 15년) 5월 5일(음력 3월 28일)에야 김태남 등의 건의로 왕후로 복위되었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는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 적모 권씨는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친어머니 한씨는 청원부부인(淸原府夫人)으로 격상되었다. 그때 단경(端敬)이라는 시호와 함께 공소순열(恭昭順烈)이라는 존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