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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 백제 온조의 형
비류(沸流)는 우태의 장남 혹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차남으로, 백제 온조왕의 형이다.
온조와 함께 고구려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비류는 해변에 살기를 원하였으나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건대 이 하남의 땅은 북은 한수를 띠고, 동은 고악을 의지하였으며, 남은 옥택을 바라보고, 서로는 대해를 격하였으니, 그 천험지리가 얻기 어려운 지세라 여기에 도읍을 이루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자, 비류는 듣지 않고 미추홀(지금의 인천)을 도읍으로 정해 나라를 세웠으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지 못하여 동생이 세운 나라로 이주하자 자결하였다. 백제의 시조가 비류라는 시조 비류설에 따르면,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졸본 사람으로 우태에게 시집와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 우태의 사후에 주몽이 졸본부여에 도읍하고 고구려를 세운 뒤 소서노를 맞아 왕비로 삼고 비류와 온조를 양자로 삼았다. 이후 부여에서 예씨(禮氏)의 아들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가 졸본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가 미추홀에서 살았다고 한다.
백제 시조에 대해서는 그 외에 시조 온조설과 시조 구태설이 있으며, 현재는 시조 온조설이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이에 따르면, 동명성왕이 졸본에 정착하여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형은 비류로, 동생은 온조로 이름 지어졌다. 이후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비류와 온조는 왕위에 오르는 가장 유력한 순위에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비류와 온조를 얻기 이전에 동명성왕과 북부여의 예씨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가 고구려에 찾아오자 동명성왕이 반겼다. 게다가 동명성왕은 첫째 아들인 유리를 태자로 임명하자, 비류와 온조 형제는 후일이 두려워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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