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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왕권을 신권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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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왕권을 신권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만 하다.

 

중종(中宗, 1488년 4월 16일 (음력 3월 5일) ~ 1544년 11월 29일 (음력 11월 15일), 재위: 1506년~1544년)은 조선의 제11대 이다. 는 역(懌),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 는 낙천(樂天)이며, 사후 시호는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이다. 묘호는 중종(中宗)으로 결정되었는데 연산군으로부터 나라를 구하여 중흥시켰다는 의미로 정해진 것이다. 반대로 38년의 재위기간 중에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그저 가운데 중(中)자를 썼다는 해석도 있다. 인종은 '종'(宗) 자로는 부족하다 하여 중조(中祖)를 제안했는데, 중종을 연산군 대신 잇는 왕으로써 '조'(祖)를 붙이는 것은 맞지 않다는 반대를 받아들여 거두었다. 성종의 차남으로 정현왕후 소생이다.

1506년 9월 2일부터 1544년 11월 28일까지 재위하는 동안 1506년 9월 2일부터 이듬해 1507년 8월까지 박원종(朴元宗)이 섭정하였고 1507년

8월부터 1543년 3월까지 친정하였으며 1543년 3월부터 이듬해 1544년 11월 28일 왕세자에게 선위(양위)할 때까지 장남 왕세자 이호(훗날 인종)가 대리청정하였고 선위한 다음날인 1544년 11월 29일 승하하였다. 반정으로 집권한 두 번째 군주였다. 그러나 사적인 욕심이나 원한으로 반정을 일으킨 세조 찬위, 인조반정과는 다른 각도에서 평가되나, 전반에는 공신 세력의 전횡에, 후반에는 외척 세력의 전횡에 휘둘렸다. 하지만, 김안로조광조의 숙청 때 중종의 모습은 사관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라고 하거나, ' 이때 양연이 대사헌으로 이 의논(김안로의 처벌)을 먼저 주장한 것은 왕의 밀지(密旨)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라고 했듯이 단순히 신권에 의해 휘둘린 왕은 아니었다. 재위 중반에 조광조 등의 사림을 일시에 기용하였으나 공훈삭제와 관련한 공신세력들의 반발과 자신의 왕권의 위협에 대해 우려하여 사림 세력들을 기습적으로 숙청한다. 이 후에는 남곤이 정국을 주도하고, 남곤 사후에는 김안로가 주도하지만, 김안로의 지나친 권력쟁투와 횡포로 인해 위협을 느껴 조광조와 마찬가지로 김안로를 기습적으로 제거한다. 이후에는 외척에게 정사를 맡긴다. 이는 후일 대윤, 소윤간의 정쟁의 원인이 된다.

 

중종은 성종정현왕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성은 이(李), 본명은 이역(李懌),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복 형인 연산군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정현왕후를 친어머니로 여기면서 자라다가 우연한 기회에 폐비 윤씨의 일을 알게 되었다. 정현왕후와의 관계는 소원해졌지만 연산군은 어린 이복동생에게는 친절하였다. 그 뒤 진성대군은 신수근의 딸과 가례를 올린다. 신수근의 아버지는 영의정 신승선으로 연산군의 정비 거칭군 부인신씨의 친정아버지이기도 했다. 친가로는 이복 형제였지만, 처가로는 처고모부와 조카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1494년에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다가 1506년음력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朴元宗) ·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조선의 새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진성대군은 자신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온 반정군을 적으로 여겼을 정도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반정군에 의해 추대 제의를 여러 번 받을 때부터 그는 신하가 임금을 택한다(澤君)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공신들의 세력은 막강하였고 중종 반정으로 추대된 이후 그는 이를 타개할 대안을 마련하는데 절치부심하게 된다.

 

즉위 초반

1506년 9월 27일 조정은 그의 책봉을 청하는 책봉주청사를 명나라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석연치 않은 폐위를 명나라에서는 문제삼았고 조선 조정에서는 연산군이 병으로 왕위를 수행할 수 없어 그가 즉위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은 다시 2차 책봉 주청사를 1507년 7월 22일에 파견하였고, 즉위 1년만인 1507년 8월 22일에 명나라 예부로부터 임시로 국사를 서리하라는 칙명을 받았다. 이어 바로 승인이 떨어짐으로서 정식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반정세력의 정치적 의도로 국왕으로 등극한 중종은 혁명을 일으킨 공신들의 세력에 밀려 실질적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나약한 국왕이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문란해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연산군이 폐지시켰던 모든 법제를 복귀시켰으며, 국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기관인 홍문관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신하들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등을 시행했다. 또한 중종은 왕도정치를 앞세워 공신들의 세력 팽창을 억누르려고 시도했으나 공신들의 힘이 너무나도 막강하여 성공하지는 못했다.

박원종, 홍경주 등의 공신 세력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려 하자 그는 사림 세력을 다시 등용하기로 결심한다.

 

사림파의 등용과 개혁 정치

큰어머니 월산대군부인의 친정 남동생이자, 경빈 박씨의 양아버지인 박원종, 희빈 홍씨의 친정아버지 홍경주 등을 부담스럽게 여긴 그는 당초 박원종성희안의 월권행위를 비판하다가 이들의 눈밖에 났던 남곤을 등용한다. 이어 훈구 공신들의 질병과 연이은 죽음, 그리고 훈구 공신의 지도자인 박원종, 성희안의 죽음으로 훈구파가 주춤한 틈을 타 사림파 인사를 홍문관사간원, 사헌부, 춘추관 등의 하위직에 등용함으로써 사림파를 다시 정계로 끌어들인다.

중종은 조광조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현량과를 실시하는 등 철저한 유교적 개혁 정치를 행하여 문벌세가를 누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인 기득권층인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싫증을 내게 된다. 특히 조광조 등 급진 사림파의 반정 공신 명부 정리 작업(공신 명부에 올라온 공신들이 진짜 공을 세웠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다수의 공신들이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일이 벌어지자 훈구파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조광조와의 갈등

중종 반정 이후 비대해진 훈구파 권신들과 척신들의 전횡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중종은 보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 수 있는 왕권강화를 원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도학 정치 실현이 목적으로서 목적이 달랐다. 후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오종록 교수는 "왕권 확립을 꾀하던 중종이 훈구파에 대적하기 위해 정암을 키웠으나 정암 등 사림파가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했다"며 "정암과 중종은 동상이몽을 꿨다"고 봤다. 급진 사림파의 개혁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심정, 김전 등 훈구파와 남곤 등의 온건 사림파를 이용, 친위 쿠데타를 계획한다.

또한 사림파의 지치정치, 군신 공치 역시 중종에게 거부감을 주었다. 조광조는 도학정치가 펴지길 꿈꿨고, 중종은 힘센 군주가 되길 갈망한 것이다. 조광조는 임금 역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사류가 되기를 원했고, 성리학 사상에 입각한 사류와 군주가 공동으로 다스리는 세계 또는 임금 역시 한 사람의 선비가 될 것을 여러번 권고하였다. 중종은 피로를 느낌과 동시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중종은 사림파 역시 하나의 비대해진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해석하여 강력한 왕권의 걸림돌로 인식한다. 일설에는 주초위왕 나뭇잎 모함 공작이 중종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에 의하면 왕의 심복이 한순간에 버림을 받은 것이다.

 

개혁의 폐지

중종 임금에게 한 궁녀가 궁궐의 나뭇잎 하나를 가져다 바친다. 벌레가 갉아먹은 자리를 따라 나뭇잎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 조씨(走+肖=趙)가 왕이 된다는 글이다.

"조광조의 역심(逆心)을 하늘이 알려준 것이옵니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자신 역시 쿠테타로 축출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여, 평소 이복 형제들, 성종의 다른 왕자군이나 기타 왕족들을 불신하고 경계했다.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조광조를 의심하나, 나뭇잎의 글씨는 궁녀가 과일즙을 발라놓은 자리를 개미들이 파먹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음모이다. 그날 밤, 홍경주와 남곤, 심정 등은 은밀히 입궐해 중종을 만나 주청한다.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사오니 이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를 투옥시킨다. 결국 중종은 1519년 남곤, 심정, 홍경주와 계획해서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들을 실각시켰고, 의심 많은 왕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 죽음을 당하게 된다(기묘사화).

 

외척 세력의 등용

조광조를 비롯한 급진적인 사림파들이 몰락한 뒤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다시 공신들의 세력이 부활할 조짐을 보였다. 중종은 공신들의 권력집중을 차단할 목적으로 외척인 윤여필, 윤여해, 윤지임, 김안로 등을 등용한다.

처음에는 이들에게 내섬서와 장악원 등의 제조 직을 제수했다가 훈련대장 등을 제수하여 도성의 숙위를 맡겼고, 이후 이들의 자녀들이자 자신의 처남격인 윤임, 윤원로, 윤원형 등이 출사하게 된다. 그러나 외척 세력은 또다른 세력을 형성하여 전쟁의 소용돌이를 만들게 된다.

 

외척의 전횡

그 다음에는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외척 세력과 반정 공신들 간의 정권 다툼으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정국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1531년에는 기묘사화 후 집권했던 심정·이항(李沆)·김극복(金克福) 등이 화를 당했고, 1537년에는 심정 일파를 모함한 김안로(金安老)·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이 주찬되는 등 재위 동안에 화옥(禍獄)이 그치지 않았다.

정국이 불안해지자 그 동안 잠잠하던 남쪽의 왜구들이 삼포왜란을 일으켜 경상도 해안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또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4군 6진 지역을 빈번하게 노략질하는 등 오랑캐들의 약탈이 끊임없이 발생하자 중종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그밖에 《속삼강행실도》(1514),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등 다방면에 걸친 책들이 편찬, 간행되었으나 기묘사화 이후로는 문화 발전 정책이 거의 정지되었다.

한편 윤임, 김안로, 윤원형, 윤원로 등의 척신 세력이 발호하였으나 그는 이를 막지 못했다.

 

최후 및 능묘

38년 2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위에 머물러 있었던 중종은 정국이 혼란을 거듭하는 바람에 이렇다 할 만한 업적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1543년 3월부터 대리청정을 맡긴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 다음날인 1544년 11월 29일 (음력 11월 15일), 5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靖陵)으로 능원에 중종 혼자만 묻혀 있다.

원래 왕릉을 조성할 때는 조선 최고의 풍수지리 학자 들로부터 최고의 명당자리를 찿아 능을 조성하는데, 정릉은 조선의 왕릉 중에서 풍수지리가 좋지 않은 자리라는 얘기가 있다. 그 근거로, 비가 올때 물이 능의 가운데 부분까지 침수가 되는데, 이러한 경우는 조선의 왕릉 중에서 정릉이 유일하다. 특히 장맛비가 한차례 지나가면 정릉의 능선은 완전히 침수가 되어 그 물이 제실까지 들어가는 등의 피해가 생기자 1562년, 원래 경기도 고양시에 있던 정릉을 현재 성종이 안장되어 있는 선릉 주변으로 이장하여 지금에 이른다.

 

중종에 대한 박시백의 평가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권신들 대부분은 어느 날 밤, 중종의 기습 전략에 의해 하루 아침에 감옥에 갇히거나 유배를 당하고 죽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이들은 조광조와 김안로였다. 이들이 비록 많은 권력을 휘둘렀다고 하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권신들이 죽은 원인은 중종의 기습적인 습격과 이들을 사사하는 명령에 있었다. 이는 비록 일부 권신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권력을 휘둘렀다고 해도 이들의 권력이 너무나 커졌다고 해도 중종은 이러한 권신들을 기습 전략으로 제거하기 전에는 없던 면모를 보였다.

자신의 의견보다는 신하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대간들의 비판에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 등 평소에는 정국에 대해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권신들에 대한 처분을 내릴 때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중종의 변신에 대해 대부분의 신하들은 놀라는 반응을 보였었다.

이에 대한 사관의 논평이 있는데, 조광조의 사사결정이 내려졌을 때 사관은 중종에 대해서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라고 논하였고, 김안로의 절도안치 결정이 내려졌을 때는 '이때 양연이 대사헌으로 이 의논을 먼저 주장한 것은 왕의 밀지(密旨)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보다 며칠 전에 상이 경연에서 ‘위태한데도 붙들지 않으니 그런 재상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라는 말을 하였고 또 우의정 윤은보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조정에 사람이 없음을 걱정한다는 뜻을 극론하였는데, 이는 대개 상이 김안로의 죄악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교시를 내려 조정에 은미하게 보인 것이다.'라고 논했다.

이는 중종이 권신들에게 휘둘린 연약한 군주가 아닌 그 권신들을 단숨에 제압할 정도로 정국을 이끌어가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이러한 정국 주도 능력을 당시 조선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검소하게 생활하였지만, 자식, 종친들이나 신하들의 사치를 막지 못했고, 학풍이 땅에 떨어진 상황을 걱정하면서도 선비들을 죽이는 사화를 주도한 왕이기도 했었다. 중종은 왕조와 자신에게 주어진 왕좌를 신권의 지나친 비대화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만 했었던 임금이었다고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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