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와왕, 해부루의 아들, 태백산 남쪽에서 유화를 만나다.
금와왕(金蛙王, 기원전 89년? ~기원전 24년 재위:기원전 60년경~기원전 24년경)은 부여의 왕으로 성은 해(解), 이름은 금와(金蛙)이다. 금와(金蛙)는 금빛이 나는 개구리라는 의미이다. 금와는 해부루의 아들이다.
해부루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된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이가 바로 유화부인이다. 유화는 부모에게 버려져 그곳에 있었는데, 금와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궁으로 맞아들였다. 유화가 햇빛을 받아 수태한 뒤에 알을 낳자 이상하게 여긴 금와는 알을 버리게 하였는데 짐승들이 알을 품어주고 짓밟지 않고 피해가는 등 기이한 일이 생기자 유화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후 태백산(太白山) 남쪽의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데려다가 방에 가두었더니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잉태하여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뒤에 고구려의 시조가 된 추모왕(鄒牟王)이 나왔다. 여기서 ‘추모’를 ‘주몽(朱蒙)’이라는 하는 것은 ‘어리석다라는 뜻’으로 중국이 낮춰 부른 이름이라는 견해가 있다. 추모가 장성하자 대소(帶素)를 비롯한 일곱 왕자들이 그를 시기하여 처치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금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추모에게 말을 기르는 임무를 맡겼다. 이후 추모가 대소의 음모를 피해 도피하자 추격대를 파견하였으나 잡지는 못하였다.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인 기원전 24년 유화가 죽자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얼마후 금와가 죽고 대소왕이 뒤를 이었다.
금개구리 설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전하기를 어느 날 곤연(鯤淵)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타고 있던 말이 큰 돌 앞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히 여겨 돌을 굴려 보니 그 곳에서 금빛을 두른 개구리 형상의 아이가 나왔다. 해부루 왕은 이를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 여기고 그 아이의 이름을 금와라 짓고 고이 길렀다. 이후 금와는 자라서 태자가 되었고, 해부루가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설화에서 나오는 곤연이라는 지명은 동부여가 멸망한 이후에는 고구려가 관리하는 졸본의 땅에 있었으며 금와의 일족들은 곤연의 호족(豪族)이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