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노산군, 숙종 때 복위되어 단종으로 묘호가 정해지다.
단종(端宗, 1441년 8월 9일 (음력 7월 23일) ~ 1457년 11월 7일 (음력 10월 21일), 재위 1452년~1455년)은 조선의 제6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고, 휘는 홍위(弘暐)이다. 1455년 숙부 세조의 정변으로 양위하였다가,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사사 혹은 교살 되었다.
폐위되어 죽어서 시호를 받지 못한 채 노산군(魯山君)으로 불리다가 이후 중종 때에 복권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당했고, 숙종 대에 가서야 성리학자들의 건의로 정종과 함께 복위되어,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잡는다' 라는 뜻의 단종(端宗)으로 묘호가 정해졌으며, 정식 시호는 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이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과 현덕왕후의 외아들이며, 조선 최초의 왕세손이기도 하다. 또한 조선왕조 27명의 임금들 중 유일하게 국장을 제 때 치르지 못한 왕이기도 하다. 승하한 지 550년 만인 2007년 5월에 단종의 능이 있는 강원도 영월에서 국장이 치뤄졌다.
1452년부터 이듬해 1453년까지 좌의정 절재 김종서가 섭정하였고 1453년부터 1455년 퇴위할 때까지 왕숙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섭정하였다.
생애 초반
1441년 8월 9일(음력 7월 23일) 단종은 당시 왕세자였던 문종과 왕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몸이 약한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후가 죽자 어린 세손을 가련히 여긴 세종은 소헌왕후와 의논하여 자신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고, 세종의 후궁으로 조모뻘인 혜빈 양씨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1448년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병중이었던 세종은 자신이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병약한 아들 문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늘 어린 손자 단종을 몹시 걱정했다. 문종마저 요절하고 나면 야심으로 가득 찬 둘째 아들 수양대군을 비롯한 혈기왕성한 여러 대군 사이에서 어린 손자가 아무 탈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전에 황보인·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왕세손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다.
세자와 즉위
단종은 1448년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450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52년(문종 2년) 4월 문종은 수양대군을 관습도감 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야심을 철저히 숨기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는 등 자신의 뜻을 철저히 감추었다. 그가 관습도감 도제조가 되자 사간원에서 종친에게 실직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핵했으나, 문종이 듣지 않았다. 세종이 우려했던 대로 문종은 즉위한 지 겨우 2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말았다.
1452년 단종은 문종의 뒤를 이어 12살에 왕위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세종의 칭찬이 자자했을 만큼 영리하였으나,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므로 혼자서 나랏일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의정부의 신하들이 도맡아 했고, 단종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특히 인사 문제는 ‘황표정사(黃票政事)' 라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어린 단종의 즉위 이래 정국이 불안해진 가운데 위축된 왕권과 달리 수양대군 등 종친의 세력은 나날이 팽창되어 갔다.
계유정난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영풍군, 정종 등은 단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문종의 후궁인 숙빈 홍씨 등은 정보를 훈신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 경쟁은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453년 음력 10월, 계유정난을 불러왔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김종서·정분 등을 죽이고 10월 10일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스스로 영의정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1454년(단종 3년) 3월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은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 1등관에 서훈하였다. 계유정난으로써 수양대군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고 말았다. 안평대군은 수양대군에 의하여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사사되었다.
양위와 사육신 사건
1454년에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의 나머지 측근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하는 일이 일어나자 계유정난을 계기로 일부 신료들은 단종이 양위해야 된다는 공론을 세웠고 이는 통과되었다. 1455년 (세조 1년),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인 한명회·권람 등에게 선위를 강요받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 (상왕이 거처하는 곳) 으로 옮겨갔다.
1456년 음력 6월에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김문기 등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조가 즉위한 이듬해(1456년)에 성삼문·유성원·하위지 등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과 무인들은 연회때 별운검을 설치한 뒤 세조 3부자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가담자의 한명인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말하고, 정창손의 설득에 의해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하여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그 바람에 1457년 단종은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노산군(魯山君), 수즉 폐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1457년 9월 금성대군은 배소인 순흥에서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운다. 금성대군,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단종도 같이 죽음을 내렸다. 또한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과 재산을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
최후
공적으로는 단종의 추모가 금기시되었지만 사망 직후 정보, 이수형 등은 복상하고 3년상을 치루기도 했다. 사후 무속에서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다.
단종은 죽은 뒤 묘호도 없이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중종 때 사림에 의해 복권 논의가 나왔으나 거절당하였다. 사림의 한 갈래인 서인, 노론은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여 중종과 효종 때 단종의 복권 여론을 조성했다. 사망한 지 241년 만인, 1698년(숙종 24년)에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능묘
단종은 1457년 17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은 이후 가매장되었다가, 59년 후인 중종 11년 1516년 12월 15일에야 봉분을 갖추게 되었다.
능은 영월에 있는 장릉(莊陵)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소재하고 있으며,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 196호로 지정되었다. 경국대전에 명시된 사대문 밖 80리 이내에서 벗어난 능 중의 하나이며, 다른 능과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이 설치되어 있다.
동학사
사육신과 생육신을 비롯한 관련자 및 단종폐위에 분개하여 관직을 버리거나, 관직에 나가지 않은 인물들을 모신 사당이 충청남도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현 공주시 반포면)에 세워졌다. 동학사 내 숙모전(肅慕殿)에 단종과 신하들의 위패가 봉안되었으며, 동학사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다.
싸리재
단종이 강원도 영월군의 청령포로 유배를 올 때 여주시-원주시 부론면-귀래면-신림면의 싸리재를 거쳐서 영월로 왔다. 이 때 단종은 관리 3명과 군졸 50명의 후송을 받았다고 한다. 싸리재는 또한 의병장 김상태의 활약으로도 유명한데, 호좌의진이라는 의병 부대의 중군부대를 이끌던 그는 영천의 조령, 문경의 갈평, 원주 싸리재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무속에서 신격화된 단종
민간과 무속에서 군왕신(君王神)의 하나로 모셔진다. 노산군지신(魯山君之神)이라고도 부른다. 영월읍에 있는 영모전(永慕殿) 서낭당을 비롯하여 영월·정선군, 삼척시 등 태백산 인근의 무속에서 신으로 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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