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 세자 폐위 배경을 세가지로 추론하다.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년 ~ 1462년 9월 7일)은 조선 시대 초기의 왕세자이자 왕족, 정치인, 화가, 시인이다. 그는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자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전주(全州), 성은 이(李), 휘는 제(禔), 자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조선 세종, 효령대군, 성녕대군의 친형이다.
1404년(태종 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위되었다. 그 뒤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세자가 되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자유분방한 활동이 문제시되어 여러 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일설에는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증(贈) 의정부좌의정 광산군(光山君)에 증직된 광산 김씨 김한로(金漢老)의 딸이자 본처인 수성군부인 김씨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
세자 시절
1407년(태종 7년) 14세에 광산 김씨 김한로의 딸과 혼인하였다. 김한로는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사위인 그가 폐위된 것을 전후하여 한때 유배당하기도 했다. 1407년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고 태종은 외척 제거 목적으로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계획한다. 양녕은 이들 두 외삼촌이 억울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을까 겁을 먹고 외숙인 민무구 형제가 태종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외면하였다.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410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사가 발생했다. 이 일로 원경왕후는 병석에 누웠고, 친정에서 동생 민무휼과 민무회가 문병 차 대궐을 출입했다. 이때 민무휼과 민무회 형제가 양녕대군을 찾아가 두 형의 억울함을 하소연을 했다. 양녕대군은 어릴 때 외가에서 자라난 터라 이들과 가까이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양녕은 두 외삼촌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품성이 잘못되었다며 도리어 외가를 비난했다.
양녕이 세자로 책봉된 뒤, 대군시절 스승이던 계성군 이래가 빈객 겸 세자의 스승으로 결정되어 왕자들을 가르쳤다. 이래는 고려말 신돈에게 저항하던 선비인 이존오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를 닮아 그만큼 강직한 선비였다. 양녕대군이 한참 거짓 미치광이 노릇을 궁리할 때 별감으로부터 계성군의 출입을 보고받자 일부러 방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개 짖는 시늉을 하였다. 이래는 들어서자 이 괴상한 세자의 행동에 놀라 제지하고 양녕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양녕은 개의 소리를 짖어대며, 마치 물어뜯을 것처럼 뛰어다니다가 이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도 했다. 이래가 다시 양녕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비로소 양녕은 처음 맞이하는 것처럼 대하였다. 이래는 밤 동안에 무척 초췌해 보이는 세자의 안색을 보고 개처럼 짖는 소리를 병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양녕은 부인하였고 이래는 이후 태종에게 그 날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였다. 그 뒤로도 이래는 세자의 언행을 낱낱이 임금 태종에게 아뢰었다. 세자는 이래 등 사부들이 와도 글을 배우려 하지 않고 다른 짓을 하였다. 동궁의 뜰 앞에 새덫을 해 놓고는 글을 배우다가도 새가 치이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나가곤 하였다. 또한 조정의 하례 때에는 머리가 아프니 배탈이 났느니 하고는, 동궁에서 혼자 새덫을 놓고 참새사냥을 즐기거나 드러누워 뒹굴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품행이 자유분방하고 색을 밝혀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심지어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가 궁으로 데려온 한 기생 출신 첩의 존재를 알게 되자 태종은 그 기녀를 사형에 처했다. 양녕대군은 부왕 태종 역시 여러 여인을 첩으로 거느리는 것을 언급하며 항의하다가 끌려나가기도 했다.
이후에도 양녕의 품행은 자제되지 않았고 이에 유정현 등이 상소를 하여, 세자에서 폐위시킬 것을 상주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그의 세자 폐위를 반대한 것은 이조판서 황희 등 소수였다. 1418년 그는 세자에서 폐위되고 양녕대군에 봉해졌으며, 그 대신에 아우인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 폐위 배경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세가지 추론을 하였다. 첫 번째로는,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
그가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세자 책봉 직후라는 설과 세자 책봉 후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부왕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가던 중 그는 문 밖에서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부왕 태종은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장차 백성들이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대에서 살게 될 것'이라며 한탄하였고 모후 민씨 역시 '충녕이 맏이었어야 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자(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는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이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해 5월 결국 세자에서 폐위되고 만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지난 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숙부들과의 골육상쟁을 떠올리며 최종적으로 충녕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는 전승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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