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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 숭유억불정책으로 부터 불교를 옹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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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 숭유억불정책으로 부터 불교를 옹호하다.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년 1월 6일 (음력 1395년 12월 11일) ~ 1486년 6월 12일(음력 5월 11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왕자, 왕족, 서예가, 정치가이다. 조선의 제3대 국왕 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원경왕후 민씨의 소생이다. 조선 세종대왕의 둘째 형으로 성씨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 이름은 (補)이다. 초명은 (祜)였는데 19세에 (補)로 개명하였다. 선숙(善叔)이고, 연강(蓮江)이며 불교 법명연강(蓮江)이고, 시호정효(靖孝)이다. 세종대왕의 형이자 세조의 백부로 실의 원로였으며, 조선의 숭유 억불 정책으로부터 불교를 옹호,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세종대왕 즉위 후에도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6대에 걸쳐서 장수를 누렸다. 임사홍은 그의 손녀 사위였고, 이량은 그의 5대손이며, 명종 의 부인인 인순왕후심의겸, 심충겸은 그의 외6대손이다.

 

생애 초반

그는 10세 시절이던 1405년 효령군에 책봉되었으며 12세 시절이던 1407년에 해주 정씨 부인(정역의 딸)과를 가례를 치렀고 17세 시절이던 1412년효령대군에 진책되었다. 1417년 자신의 아호(雅號)이기도 한 연강(蓮江)이라는 법명(法名)으로 수계를 받았다. 그는 어릴적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30세 전에 이미 학문과 덕성을 이룩하였고 붓글씨에도 능해 명필이었다고 전해진다. 활쏘기에 능숙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는 일찍부터 좌찬성 정역(鄭易)의 딸과 혼인하여 6남 1녀를 낳았으며, 서자녀로 1남 1녀를 두었다. 불교를 좋아하여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의하였다.

 

불교 활동

불교를 심오하게 믿어 조정의 숭유억불 정책하에서 불교 보호의 방패 역할을 감당하였다. 원각사 창건 때에는 조성도감 도제조를 맡았다. 이 때 주조되어 1985년까지 보신각에 달려 있던 큰종과 탑골공원의 10층 석탑은 그 제조기법이나 예술성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10층 석탑은 국보 제2호로, 원각사지 대종은 보물 제2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법화경》, 《금강경》, 《원각경》, 《반야심경》, 《능엄경》, 《선종영가집》 등 불경의 번역과 교정에도 힘썼고, 많은 사찰을 순회하면서 신도들을 온후하게 계도하였다. 그리고 향촌의 자치규약인 향헌(鄕憲) 56조를 지어 백성들의 윤리 도덕심을 함양하였으며 유불심법동일원(儒佛心法同一原)의 이념을 추구하였다.

 

생애 후반

1395년 음력 12월 11일에 태어나 91세의 천수를 다하고 1486년(성종 17, 丙午年) 음력 5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예장되었다. 묘소는 1972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현 사당은 1736년(영조 12)에 왕명으로 효령대군 묘 앞에 처음 세우면서 '청권사'라고 하였다. 슬하에 7남을 두었으며 1459년(세조 4) 정월, 여섯째 아들 원천군(原川君)을 병사한 아우 성녕대군에게 출계시켜 대를 이어 제사를 봉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생전에 손자 33인, 증손자 109인으로 후손이 번성하였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파종회 중에 자손이 가장 번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특별시1984년 11월 7일 청권사 앞길을 '효령로'로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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