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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위로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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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위로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다.

 

민생과 문화

임금이 된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면서 전후 복구 사업을 시행하였으며, 밖으로는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1611년 양전 사업을 벌였다. 이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하고 인경궁을

건설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군사와 외교

광해군은 파주 교하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수도를 교하로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광해군은 1618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을 건국하자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 방비에 힘썼다. 한편, 1619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 지방을 공격하여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김경서를 보내어 명군을 원조한다. 강홍립은 명나라군이 사르후, 상간하다, 아부달리에서 잇달아 패주하고, 부차 전투에서 조선군의 주요 지휘관이 전사하고 병력의 2/3가 괴멸하자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 광해군은 후금에 본의 아닌 출병임을 해명함으로써 후금의 침략을 모면한다.그러나 1622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가도 주둔으로 긴장감이 점점 높아진다

 

정적 숙청

1609년 광해군은 자신의 세자 책봉 과정에서, 장자 승계 원칙을 주장하며 자신을 압박하던 명나라가 활용하던, 친형제이자 장자 임해군을 교동으로 유배하여 죽이고, 김직재의 옥과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발생하자 1613년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과 북인은 인목왕후의 의인왕후 능(陵) 저주설을 조작하기도 하였다. 김제남은 죽은 지 3년 만에 다시 부관참시되었으며 그 일족 또한 막내아들과 부인을 제외한 세 아들이 화를 당하였다.

 임해군은 자신의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었다고는 하나, 광해군 자신의 유일한 친형제였고, 투명하지 못한 살해 과정으로 일부 신료들에게 의구심을 주기도 하였다. 영창대군 살해 역시 광해군과 북인들의 측근들이 치밀한 계획 아래 주도하여 결과적으로 광해군에게 패륜군주 이미지를 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만 하고 말았다. 1614년 광해군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였다가 얼마 후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였다.

1615년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인 능창군까지 폐서인하여 교동에 안치해버리고, 결국 목을 매어 자결하게 하는 등 왕권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이는 그동안 기가 죽어 있던 서인 세력에게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는 셈이 되었다.

광해군과 이이첨 일당은 영창대군 살해 시점 직후부터, 각종 조작설과 허균 등을 비롯한 강경파 관료, 유생들을 동원한 상소 릴레이를 펼치며 끊임없이 인목왕후 폐비 공작을 전개하였고, 1618년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 사건으로 정국은 들끓었으며,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궁궐복원 공사

무리한 토목 공사를 연이어 강행하여 궁궐 복원 등으로 백성들의 민심도 이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광해군은 그동안 자신이 임진왜란 때부터 쌓아왔던 일반 백성의 민심을 점차 잃게 되었다.무리한 공사와 공역은 준전시 상황과 가뭄 등 천재지변과 겹쳐 당시 경제력에 부담을 주었다. 또한, 측근들의 월권과 부패가 문제시되었으며, 궁궐 복원 과정에서의 자금 문제도 민심이반의 원인이 되었다. 광해군 집권 당시의 실권자 이이첨, 유희분, 박승종은 부원군 칭호의 '창'자를 따 3창 부원군이라 일컬어졌다. 일부 신하들과 후궁들 사이에서는 뇌물로 벼슬을 팔고 사는 비리를 저지르게

되면서 서인과 반정 세력에게 정치적으로 명분을 주게 되었다.

 

측근들의 권력 남용

광해군 재위 시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이이첨과 상궁 김개시, 허균 등은 무수한 옥사를 일으켜 반대파 신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왕권을 위협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는 광해군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성리학의 도덕주의, 도의 정치, 왕도 정치를 기본 이념으로 삼던 조선 사대부들에게 이같은 행위들은 반발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이첨과 정인홍이 무리하게 능창군의 역모와 영창대군의 옥사를 주관하고, 1617년부터 인목왕후의 폐모론을 주장하는 것 역시 사림의 반발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한편 옥사를 일으킨 또 다른 주역인 허균 역시 다른 주역인 이이첨, 김개시 등에 의해 처형된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던 당일 광해군은 처음 반정을 접하고 이이첨의 반역으로 오해하였으며, 한편 김개시는 인조반정 직전 정보가 누설되어 반정 세력들을 검거할 수 있었음에도 반정 세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광해군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등 광해군 정권에 결정적인 위해를 끼쳤다.

 

폐위 이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된 후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다가 1641년 67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서인 이귀, 김류, 최명길, 김자점 등은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을 받들어 ‘반정’을 단행하고 궁궐을 장악했다. 이들은 광해군을 인목왕후 앞으로 끌고 가 정죄한 뒤 유배시켰다. 인목왕후는 광해군과 폐세자에 대한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인조와 반정 세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반정을 마무리 짓게 된다. 곧 반정군에 의해 이이첨, 정인홍, 김개시 등은 죽임당하고, 40여 명의 관리가 구금된다. 광해군은 곧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던 아들 폐세자 질과 며느리 박씨는 탈출에 실패하고 자결하였고, 부인 유씨 역시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뒤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유배살이를 하였으며, 후금(청나라)측에서 정묘호란의 명분으로 광해군의 폐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차례 역모 사건에 거론되었는데, 심지어는 광해군 스스로 친필 밀서를 역모 세력에게 전달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와 집권 서인은 그를 죽이지 않고 천수를 누리도록 하였다. 한편 유배지에서는 상궁과 포졸들로부터 영감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듣기도 했다. 초연히 유배 생활을 지내던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에 67세를 일기로 죽었다.

 

사후

사후 장례는 박씨 집안으로 시집간 딸에 의해 봉사하게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 후반기 내내 친형 살해와 폐모살제를 이유로 패륜자로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조금씩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명나라와 후금 전쟁 중 강홍립을 파견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점

역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한 것으로 간주되어 조선 시대 내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광해군 대의 외교를 중립 외교 혹은 실리 외교로 보는 시각이 등장하면서 여러모로 재평가, 현재는 폭군으로서의 이미지가 많이 희석됐다. 그의 묘소는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적 제363호로 지정되었다.

 

선조 독살설 배후 의혹

1608년 선조는 약밥을 먹고 사망한다. 그 뒤 인조와 서인은 반정을 일으키면서 광해군이 독이 든 약밥으로 부왕을 살해했다는 주장을 했으나 선조의 약밥에 독이 들었음은 확인된 것이 없다. 다만, 선조에게 약밥을 지어 올린 사람이 광해군 대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상궁 김개시라는 점과, 이 당시 이이첨이 탄핵을 받고 유배형을 받았으나 차일피일 유배를 미루고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점을 두고 관가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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