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추사체, 개화사상가이며 고증학에 뜻을 두다.
청나라 왕래
24세 때인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에 돌아온 뒤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때 〈실사구시설〉 등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김정희는 그밖에도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茶)를 좋아하여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과거 급제와 세자의 사부
1819년(순조 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권지세자시강원, 예조 참의를 거쳐 세자시강원설서로 효명세자를 보필하였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삼사의 언관을 두루 역임한 뒤 승문원검교, 1823년 규장각대교, 암행어사 등에까지 올랐다. 그 무렵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이자 19세의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 보덕을 거쳐 필선이 된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죽고 나자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우명이 그를 탄핵하여 파면되었으며, 1830년 그 아버지 김노경은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고금도(古今島)로 귀양을 가게 된다. 김우명은 비인현감으로 있다가 암행어사로 내려온 김정희에게 파직된 바 있었는데, 이때문에 김정희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김노경은 순조가 죽던 1834년(순조 34년) 순조의 특별 배려로 유배에서 풀려난다.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의정부의 검상(檢詳)으로 되돌아온 뒤 1835년(헌종 1년) 친분이 있던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 이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1836년(헌종 2)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을 거쳐 다시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하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금석학과 고문판독 분야 개척
그는 이전까지 사서육경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金石學), 사학, 문자학, 음운학, 천산학(天算學), 지리학, 천문학 등의 학문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는 박지원과 박제가의 가르침은 그가 실용적인 학문을 찾아서 연구하게 하는 이념이 되었다. 당시 신라와 고려시대의 묘비와 지석 등이 각지에서 발견, 출토되기 시작하면서 문자 해독이 이루어졌고,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선에서 금석문 연구를 "금석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선구자이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그는 금석자료를 호고적(好古的) 취미로 대하던 당시까지의 풍조를 비판하고, 중국의 경우를 들어 금석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하였음을 주장하였다. 또 경학과 역사학에서 필수 불가결한 보조적인 학문 분야라고 하여 그 효용을 역설하였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김정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당시까지 “무학 대사의 비” 또는 “고려 태조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及衆臣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것을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에 기록되어 있으며,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등과 같은 저서도 남겼다. 그의 학문 태도를 밝힌 글로서 유명한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
으로 되어 있다. 그는 북학파 학문과 청나라의 고증학까지 두루 섭렵하였으므로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자제군관으로 연행을 다녀와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관료생활 틈틈이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또한 문무왕비와 김인문 묘비 등에서 발견한 신라 성한왕이라는 글자에 주목, 경주 김씨의 역대 족보와 비교, 대조하여 성한왕이 김알지 또는 김알지의 아들인 세한과 동일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또한 소호금천씨와 파경진백, 투후에 대한 단어도 확인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에서 태어났다는 문중의 시조 설화와 배치되는 것이라 여러 사람의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됐다. 그리고 금석문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금석문에 대한 해독, 문자판독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정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의 금석학을 계승한 학자들로서는 신위, 조인영, 권돈인, 신헌, 조면호(趙冕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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