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 체포와 옥사, 그의 죽음 원인은?
만주사변 전후
1930년 4월 20일에 유자명, 장도선, 정해리, 유기석 등은 아나키스트 무력투쟁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으나 별다른 활동이 없다가 만주 사변 이후에 이회영, 정현섭, 백정기 등의 주요 아나키스트 거물들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 단체는 기관지인 남화통신을 발간하였다. 이회영은 1931년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2년초 상해 사변이 일어나자 이회영은 중국 국민당을 찾아아 교섭, 자금과 무기지원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공격, 만주침략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 동지들이 상하이로 집결하여 협의기구로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피선되었다.
1931년 9월 이회영은 정화암, 백정기, 김성수(金性壽), 그리고 중국인 왕아초(王亞樵), 화균실(華均實), 일본인 출신 아나키스트 전화민(田華民, 일본명 佐野), 오수민(吳秀民, 일본명 伊藤) 7인과 함께 상하이의 어느 건물에 지하에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였으며, 일본측 기관 기물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며 기획, 선전, 연락, 행동 등 부서를 두는 비밀행동조직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였다.
이회영은 흑색공포단을 지휘하였으며, 흑색공포단의 단원들인 천리방, 백정기,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유기문(柳基文) 등은 중국 국민당 당내의 친일 그룹의 리더인 왕정위(汪精衛)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대신 그의 부관을 사살하였으며, 아모이(厦門)에 있던 일본 영사관을 폭파했다. 1932년 1월 흑색공포단원을 텐진에 파견, 이들은 천진부두에 일본 군수물자를 적재한 일본 기선을 텐진 앞바다에서 폭파시키고, 천진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여 영사관 건물과 시설 일부를 파괴시킨뒤, 한명도 잡히지 않고 도주했다.
체포와 옥사
1932년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상해 사변이 일어나자 그는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파괴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결정하고, 중국 국민당에게도 협조를 구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9월 중국 국민당 요인 이석증(李石曾), 오유휘(吳稚暉), 호한민(胡漢民)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 동북부에 새로운 거점 확보와 동시에 관동군 사령관 무토(武藤)대장을 암살 계획을 정하고 북행을 결정하였다. 1932년 11월 만주의 연락 근거지의 확보와 지하공작망 조직, 주만 일본군사령관 암살 등 아나키스트의 활동범위를 넓히기 위해 상하이에서 다롄(大連)으로 이동을 결심하였다. 당시 만주는 일본의 강력한 영향아래에 있어 대단히 위험했으므로 주위의 동지들이 말렸으나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조선인들의 제보와 일본 밀정의 첩보, 그와 사상이 달랐던 조카 이규서 등의 밀고로 이동중 다롄 항구에서 일본 경찰과 중국수상서원에게 체포되었고, 일본 영사관 감옥에 수감되었다.
11월 17일 이때 이미 노인이었던 그는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했다. 연락을 받고 시신을 찾으러 간 유가족에게 다롄 수상경찰은 그가 자살하였다고 했으나 믿지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65세였다.
사망 원인
보통 그의 죽음 원인은 고문치사에 의한 죽음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경찰에서는 고문 행위를 숨기려고 쇠창살에 목매 자살했다는 낭설을 퍼트렸으나 '대련수상서유치중 괴! 액사한 노인(大連水上署留置中 怪! 縊死한 老人)'이라는 기사가 중앙일보로도 보도되었다. 그러나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그가 삼노끈(삼으로 만든 노끈)으로 목을 매서 자결했다고도 보도되었다. 사망 당시 일본 영사관 당국은 체포된 노인이 유치장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발표했으나, 서둘러 그의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수상한 정황 때문에 고문 치사한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의 유해에는 '안면에 선혈이 낭자하고 타파오에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는 목격자의 진술이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 중국 항일 운동가인 김소묵의 보고서에 의하면 1932년 11월 17일에 일제가 뤄순 감옥에서 재판도 거치지 않고 이회영을 교수형에 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경찰의 이회영 체포 과정에서 4등선실의 수많은 중국인 중 정확히 이회영을 지목한 것을 의심스럽게 여긴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들은 마지막으로 이회영이 상하이를 떠날 때 만난 인물인 이규서와 연충렬을 의심하였고, 증거를 가지고 그들을 추궁하여 일본 경찰에 밀정행위를 한 것을 확인하고 처단하였다. 일제의 밀정들의 밀고 외에 조선인 제보자들, 그리고 임정 인사의 일족들인 이들의 사상의 차이도 역시 그를 밀고하여 옥사
하 만드는 원인이 됐다. 연충렬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요인 연병호의 둘째 아들이자 연미당의 친정오라비로, 독립운동가 엄항섭의 처남이었다.
이규서는 1932년 10월 연충렬 등 3명과 함께 백정기에게 암살당한다. 그러나 그의 조카 이규서가 일제의 밀정 노릇을 했다는 근거는 없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삼촌을 신고한 것 이외에 일제에 협력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사후
당시 조선에는 부인 이은숙과 6세된 아들 이규동이 있었다. 시신은 화장되어 1932년 11월 28일 뤼순에서 배편으로 장단군에 도착, 변영태(卞榮泰), 송진우, 윤치호, 김성수, 여운형(呂運亨), 장덕수(張德秀) 등이 영접하여 노제를 지낸 뒤 선산인 개풍군 중면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그의 6형제 중 다섯째 동생인 이시영만이 유일하게 생존하여 그해 11월에 귀국했다. 셋째 딸 이현숙은 해방을 보았으나 귀국하지 못하고 만주 창춘에서 28세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우당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현재 그의 묘소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 2000년 중국 정부는 특별히 그에게 항일혁명열사 증서를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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