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보기

김종직, 조의제문,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다.

반응형

 

김종직, 조의제문,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다.

 

김종직(金宗直, 1431년 6월 ~ 1492년 8월 19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이다.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여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승정원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 판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의 한사람이자 중시조격이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왕조 수립 이후 성리학을 전승한 것은 길재, 권우였고, 사림파 출신으로 처음 조선정계에 진출한 이는 정몽주, 권근이었으나, 세조 이후 조선 조정에 본격적으로 출사한 것이 김종직과 그의 동료, 제자들이었으므로 김종직을 사림파의 실질적인 중시조로 간주한다. 김종직은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 이를 통상 붕당 정치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정여창,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조광조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으며, 남효온남곤, 송석충, 김전, 이심원 역시 그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초 회왕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기록에 남겼으나 그자신은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조의제문과 풍자

조의제문은 단종과 세조를 초나라 의제와 항우에 비유했다. 그런데 문장이 워낙 난해해 당대의 식자층도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훗날 조의제문을 접한 연산군이 “어찌 이 글이 어떻게 세조를 능멸하고 노산군을 위한 제문이란 것인가?”하고 되물을 정도였다.

조의제문은 중국 진나라 때 항우가 초나라의 의제를 폐한 것에 세조가 단종을 폐한 것에 비유하여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이었다. 항우는 스스로 보위에 오른 뒤 의제를 강에 던져 죽인다. 김종직은 단종의 시신이 강에 떠내려갔다는 풍설을 듣고 중국의 고사에 빗댄 것이다. 이 글은 그의 사후 이미 죽어 땅에 묻힌 김종직을 부관참시시키고 숱한 선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도 관직에 나간 것에 대해 이후 비판의 소재가 되었으며, 허균은 김종직론 이라는 비평을 남겨 그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그의 글 중 조의제문은 훗날 성종실록의 편찬 과정에서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 등에 의해 사초에 올려지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다.

 

사화와 부관참시

조의제문이 문제가 된 것은 그가 세조의 찬탈에 비판적이며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직설적으로 비판한 것인가 여부는 불확실하며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정문형·이극돈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장악하여 훈구파를 비판해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날조, 해석했다고 평가된다. 이후 다른 훈구세력 역시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김종직과 그 일파의 처벌에 찬성한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남곤·이종준(李宗準)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이때 그가 저술한 글을 세상에 전하지 못하게 불에 태워 없앴으나, 그의 외조카 강중진이 화를 당하면서 10여권의 책을 숨겨두어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1506년 중종이 즉위한 뒤 조광조, 김식 등 김굉필정여창의 문하생들이 조정에 다시 출사하면서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다.

 

유자광과의 원한관계

유자광은 종 출신 서자로 세조의 총애를 받은 이후 예종, 성종, 연산군 때까지 요직을 지냈다. 유자광은 남이가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하여 죽인 일이 있는데(남이의 옥사) 김종직은 유자광을 혐오하고 경멸하였다.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유자광함양대관림을 돌아보고 소고대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내려와 학사루를 보고 절경에 감탄하여 아전에게 필묵을 시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학사루에 걸어놓았다.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유자광이 지은 시가 학사루 현판으로 걸린 것을 보고 떼도록 지시한다. 그는 유자광의 시가 함양 동헌의 현판에 새겨있는 것을 보고 소인배의 글이라 하여 떼내어 불사르게 했다.

 

김종직 : 아니, 유자광 따위가 감히 학사루에 현판을 걸 자격이 있느냐? 고매하신 선비들의 현판 가운데 어찌 쌍놈의 작품이 걸릴 수 있느냐? 당장 저 현판을 당장 내려라.

하인 : 사또, 그래도 이 현판은 관찰사 나으리의 현판이옵니다.

김종직 : 관찰사가 아니라 정승이면 무엇하리? 쌍놈은 쌍놈이니라.

 

김종직은 대노하여 아전에게 호통을 치고 그 현판을 철거하여 아궁이에 태워 버렸다. 그러나 이 일은 입소문으로 전달되었고 관찰사 유자광이 이를 듣고 불쾌하게 여겼다 한다. 또한 천첩 출신 서자로 출신성분에 열등감을 가진 유자광은 이 일로 김종직을 증오하게 된다. 이는 후일의 '무오사화' 의 한가지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성리학적 윤리의 실천으로 학행일치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인심이 이를 통쾌히 여겼고, 함양에는 그를 찾아 문인들이 몰려들었다.

김종직이 관직을 그만두고 밀양으로 낙향할때 문하생들이 서울에서 정자에 술상을 차려놓고 송별시회를 했다. 이때 초청하지도 않은 유자광이 이곳에 들러 인사를 하면서 선생에게 술잔을 권하여 마지못해 잔을 받게되자 선생의 제일 나이 어린 제자 홍유손이 '무령군 대감! 송별시 한수 지어 보시우! 후세 사람들 중 누가 또 대감의 시를 현판해서 걸지 모르지 않습니까 ?'라며 조롱하였다.

함양 학사루 사건을 빗대 조롱한 것으로, 무안당한 유자광은 이후 김종직과 그 문하생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당시에 세도도 막강하였고 벼슬도 높았던 유자광은 선비들로부터 이렇게 모욕을 당하자, 이극돈, 임사홍 등과 손잡고 선비들을 몰살 시켰던것이다.

 

사후

이후 중종사림파가 조정을 장악하게 되면서 선비의 사표로 추대되었다. 조광조는 그를 성균관 문묘에 배향하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기묘사화로 그의 문하들은 다시 큰 타격을 입었으나, 1565년 윤원형 등이 축출되면서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사후 신도비가 세워졌고, 지중추부사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홍귀달(洪貴達)이 글을 지었으나 임진왜란정묘호란 등으로 유실되었다. 1634년(인조 12년) 여헌 장현광이 다시 신도비를 세우고, 창원대도호부사 김해진관병마첨절제사(昌原大都護府使 金海鎭管兵馬僉節制使) 여발(吳汝撥)이 글을 써서 다시 건립한다. 묘갈명도 다시 개보수되어 우암 송시열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1689년(숙종 15년) 송시열김수항 등의 건의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증직(贈職)되고, 1709년(숙종 35년) 2월 문간(文簡)에서 문충(文忠)으로 시호가 고쳐졌다. 시호(諡號)는 정2품 이상 대신에게만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畢齋集), 유두유록(遊頭流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동문수(東文粹)》 등이 있다. 총재관으로서 《동국여지승람》 55권을 증수하였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령 쌍림에 부조묘(不朝廟)가 세워졌고,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 연관글

[역사보기] - 조의제문, 김종직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꼬다.

[역사보기] - 무오사화, 사초가 원인이 된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