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 연산군에게 장흥군부인 신씨와의 상봉을 주선하다.
임사홍(任士洪, 1445년 ~ 1506년 음력 9월 2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외척, 사상가,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풍천으로 그의 6대조 임자송은 친원파이다. 초명은 사의(士毅), 자는 이의(而毅)이다. 신수근 등과 함께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연산군 에게 알려 갑자사화의 빌미를 제공한다. 음서로 출사한 뒤 사재감사정과 사직을 거쳐 1465년 조선 왕실의 인척이자 겹사돈으로 효령대군의 손녀이며 보성군의 딸인 전주 이씨와 결혼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으며, 그 아들 임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혼인하고, 다른 아들 임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인하여 두 임금의 사돈이기도 했다. 다른 아들 임희재는 사림파 정치인이었다. 관료생활 초반 한명회를 규탄하는 등 소신으로 활동하다가 1478년의 흙비 문제를 놓고 금주와 근신을 주장하는 대간에 대해 대단하지 않은 변고에 술을 금지할 필요가 있느냐고 비판했다가 언관들과 갈등하다 12년간 유배상활을 했다.
이후 사역원과 승문원에서 한어를 가르치다가 이조판서(吏曺判書), 병조판서, 숭정대부가 되었다가 1504년 풍성군에 봉해지고, 우참찬, 좌참찬을 거쳐 숭록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한 때 삼정승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중종반정 직후 살해된 뒤 20일만에 부관참시당했다. 글재주에 능하여 많은 신도비와 묘비명을 썼고, 저서와 작품을 남겼으나 묘비명을 제외한 작품들은 대거 실전되었다.
그 뒤 아들 임숭재가 연산군의 총애를 얻어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폐비 윤씨 추숭 문제를 놓고 사림파(士林派)와 갈등하던 연산군에게 유자광, 신수근 등과 함께 장흥군부인 신씨와의 상봉을 주선한다. 사림파를 해치기 위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설이 통설로 제기되어 왔으나 갑자사화 때는 그를 변호하던 훈구파 인사들이 대거 희생되었고, 직접적인 원한관계에 있는 인물은 처조카 이심원만이 유일했으므로 1970년대 이후 궁중파대 부중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대두되었다. 셋째 아들 임희재는 김종직의 제자였고, 연산군과 중종때의 사림파 정치인 남곤(南袞)은 그의 외사촌 동생이었다.
폐비 윤씨 사건 확대
즉위 직후 사초의 기록을 우연히 찾아 본 연산군은 정현왕후가 자신의 생모가 아니며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사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를 왕후로 추숭하려는 사업을 시도했고, 이때 사림파 관료들은 선왕 성종의 유지를 이유로 폐비 윤씨의 추숭을 반대했다. 이때 임사홍은 신수근, 유자광 등과 함께 폐비 윤씨의 생모 장흥군부인 신씨를 연산군과 만나도록 주선한다. 임사홍은 신수근과 함께 궐내에 출입하던 유자광을 통해 연산군에게 선을 댔다.
생모의 사사 외에 외할머니가 그때까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연산군은 임사홍을 통해 외할머니 고령군부인 신씨를 만났고 신씨가 전해 준 피묻은 적삼을 보고 이성을 상실했다.
그의 세 아들 중 총명했던 셋째 아들 임희재는 연산군의 살육을 비판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임사홍은 아들 희재가 죽임을 당하던 날에도 슬픈 내색을 하지 않고, 평일과 다름없이 그의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고기를 먹으며 풍악을 울리니,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이를 엿보고는 더욱 신임과 은총을 더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무서운 사람이라며 경계하였다.
1504년 이후로는 앞서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일일이 앙갚음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모두 부관참시(斬屍)하였다. 후대의 사림파들이 기록한 실록의 평가에 의하면 온 조정이 그를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비록 세 신씨(愼氏), 즉 신수근·신수겸·신수영 형제라 할지라도 또한 조심스럽게 섬겼다고 한다.
가정의 불행
그는 가장 사랑하던 셋째 아들 희재를 잃었다. 임희재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김종직의 제자가 되었다.연산군 4년 아버지 임사홍과 관련된 추문을 극복하고 장원급제를 하기도 하였다. 야사에 따르면 임희재는 집 병풍에다가 연산군을 진시황에 비기며 그의 폭정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 연산군이 어느 날 임사홍의 집에 찾아갔다가 이 병풍을 보고 격노했다. 그리고 임희재를 죽이겠다고 하자 임사홍이 "그렇지 않아도 이놈이 불초하여 제가 먼저 처치하시라고 아뢰려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들이 죽던 날,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잔치를 벌이고 흥청거리며 놀았다. 그날 저녁에야 연산군 일행이 떠나간 뒤 세인의 이목을 피해 대성통곡했다 한다.
다른 야사에서는 임희재가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자 연산군에게 그가 참소하여 죽이게 했다 한다. 최용범은 이 설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비정한 아버지, 인간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보인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실록에는 임희재가 무오사화에 희생된 이목의 도당으로서, 이목의 집을 수색했을 때 시국을 비판하는 임희재의 편지가 나왔기 때문에 희생된 것으로 적혀 있다.
임사홍 자신도 유자광과 함께 이극균의 친구였다 하여 처형당할 뻔하기도 했다.
임사홍보다 연산군에게 더 가까웠던 또 다른 아들 임숭재 역시 연산군에게 농락당했다. 임숭재는 개인적으로 미인을 알선해서 연산군에게 공급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누이동생인 문성정(文城正) 이상의 부인도 있었다.
위선과 야만성에 대한 체념
결국 폐비 윤씨의 복권으로 만족하려던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살육극으로 번져나갔다.
총명한 사람이던 임사홍은 이런 파행의 세월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구의 그 날이 오면 자신이 먼저 희생될 것도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의 폭주를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도 책임의 일부를 쓰고 타죽을 것을 알면서도 집에 불을 지르는 사람과 같았다. 그는 사회가 뒤집어쓰고 있던 위선의 껍질을 벗기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래서 풀려난 야만성에 희생되기를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들 희재, 사촌 동생 남곤 등이 연루되었으나 아무도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을 추국하는 형관이 되는 것은 한사코 거부하였다.
생애 후반
1504년,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모의하여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사건을 보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디. 특히 무오사화때, 이전에 당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 사림파들을 일망 타진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아들인 임희재도, 외사촌 동생인 남곤도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까닭으로 화를 입었으나 구제하지는 못했다.
1504년 6월 자헌 대부(資憲大夫) 풍성군(豊城君)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7월초 겸 예문관 제학(兼藝文館提學), 이후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병조판서에 이르렀지만 사림파로부터 연산군의 악행과 폐륜적인 행동을 부추긴 인물로 지목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495년에는 아들 임광재를 1505년 아들 임숭재를 병으로 잃었다.
1504년 8월초 그의 집에서 병이 나았다는 이유로 특별히 가자되어 8월 16일 종1품 숭정대부의 품계를 받아 숭정대부 병조판서(崇政大夫兵曹判書)가 되었다.
1505년 조선에 입국한 명나라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로 임명된 이조 판서 김수동(金壽童)이 원접사직을 사양하는 바람에 그가 원접사가 되었다. 그해 9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되었다. 10월 병조판서로 연산군에게 건의하여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는 이에게는 가족을 데리고 함께 부임할 수 있게 배려해줄 것을 청하여 성사시켰다. 그 뒤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는 이 역시 가족들을 함께 데리고 가도록 편의를 봐줄 것을 건의하였으나 사헌부, 사간원의 비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후
7월 20일 우참찬으로 승진 7월 29일에는 다시 좌참찬이 되었다. 8월 17일 지사로 전임하였다가 닷새만에 예문관의 제술을 맡아보게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촉체(蜀體) 해서(楷書)에 능하였으며, 작품으로는 광주의 서거정의 묘비명, 금천의 노사신의 신도비문, 양주의 박중선묘비문, 광주의 이계손묘비명, 한확 묘비명, 연천의 영원윤호묘비명, 월산대군의 비명 등이 전한다. 이후 정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경쟁자였던 신수근, 김수동 등에게 밀리고 끝내 1506년 음력 9월 2일 중종 반정 때 아우 임사영과 함께 반정군에게 붙잡혀 격살되었다. 향년 62세였다. 그의 시신은 서둘러 여주군 능현리 선영에 장사되었다. 그러나 임사홍이 죽은 뒤 20여일 후에 새 임금 중종에게 의금부가 아뢰기를 “임사홍은 선왕조에서 붕당과 결탁하여 조정을 문란케 하였으되 오히려 관전(寬典)을 입어 처단을 모면하더니 폐왕조에 이르러서는 그 아들 임숭재를 연줄로 하여 나인 장녹수에게 빌붙어 온갖 꾀를 다 부리며 악한 일을 하도록 부추겼고, 충직한 사람들을 해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임금을 불의에 빠뜨려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적몰가산(籍沒家産)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결국 그는 부관참시되었고, 후에 누군가 시신을 다시 수습하여 매장하였다.
사후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24-8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근처에 아버지 임원준, 할아버지 임견의 묘소가 있다.
셋째 아들 임희재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화를 당하였으므로 연좌되지 않았고, 그의 외사촌 동생 남곤 역시 김종직의 제자인 사림파 정치인으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유배생활을 하였으므로 연좌되지 않았다. 남곤은 유배 중 연산군을 축출하자는 박원종, 성희안 등의 거사에 동조, 지지를 보내기도 한다. 1489년(성종 20년)에 그를 비판하여 논란이 된 처조카 주계부정 이심원 역시 사림파 인사로 김종직의 문인이었다.
선조 이후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그는 간신의 대명사로 비판 일색이었다. 허균(許筠)의 홍길동전에서 조차 그는 간신으로 매도된다.
대한민국의 작가 정비석의 작품인 '소설 연산군'에서는 그가 연산군을 충동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1995년 이후 연산군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면서 일방적으로 간신으로 몰린 임사홍이 간신이거나 무오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제공자는 아니라는 이견도 대두되고 있다. 사림파를 해치기 위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설이 통설로 제기되어 왔으나 갑자사화 때는 그를 변호하던 훈구파 인사들이 대거 희생되었고, 직접적인 원한관계에 있는 인물은 처조카 이심원만이 유일했으므로 1970년대 이후 궁중파대 부중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하였다.
(세조 11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숭록대부 지중추부사(崇祿大夫 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작위는 풍성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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