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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 의민태자,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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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 의민태자,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다.

 

의민태자(懿愍太子, 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는 대한제국황태자이자 일본 제국의 군인이다. 성과 이은(李垠), 아명은 유길(酉吉), 는 광천(光天), 아호는 명휘(明暉), 명신재(明新齋)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사후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황태자(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皇太子)라는 시호를 올렸으나 정식 시호가 아닌 사시이다. 황태자로 책봉되기 이전의 작호인 영친왕(英親王)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헌황귀비 엄씨이다. 순종의친왕, 덕혜옹주와는 이복 형제이다. 1897년에 경운궁 숙옹재에서 태어나 의친왕을 제치고 병약하여 아들이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7년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10년에 한일 병합으로 대한제국 황제가 왕으로 격하되면서 왕세자가 되었으며, 1920년에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 정략혼인을 하였다. 1926년에 순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제2대 창덕궁 이왕(李王)이 되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중장에 이르렀다. 1963년에서야 혼수상태인 채 대한민국에 영구 귀국하여 병상에서 생활하다가 1970년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홍유릉에 안장되었으며, 원호는 영원(英園)이다.

이은이 대한제국의 황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 육군에 복무하였고, 일본 황족과 결혼하였으며,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친일 논란이 있다.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인명사전 명단에서 제외하였다.

 

출생과 황태자

책봉 1897년 10월 20일경운궁 숙옹재에서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궁인 엄씨이다. 1900년 8월 8일에 의정부 의정서리 탁지부대신 조병식이 친왕봉호망단자(親王封號望單子)를 고종에게 올렸고, 궁내부대신 서리협판 윤정구는 황자의 정명단자(定名單子)를 상주하여 은(垠)으로 이름이 정해졌다. 8월 17일에 경운궁 중화전에서 이은을 영친왕(英親王)으로 책봉하며 금책과 금인, 칠장복을 하사하였다. 한편 생모 궁인 엄씨는 이은의 출생 이후 1897년 10월 22일에 귀인, 1900년 8월 3일에 순빈(淳嬪) 1901년 10월 14일에 순비(淳妃), 1903년 12월 25일에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1902년에 대한천일은행 (현재 우리은행) 제2대 은행장으로 이은이 임명되었고, 이를 보좌하기 위한 부장에 내장원경 이용익이 임명되었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에서 영친왕 명의로 16주를 인수하고, 8000원을 자본금으로 납입함에 따라 총회에서 대주주인 영친왕이 은행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은을 은행장으로 세운 것은 은행의 창립 초기에 기반을 확실히 다지기 위함이었다. 대한천일은행은 한성의 유력 상인들이 주도하고, 고종이 내탕금 3만원을 지원하면서 설립되었다. 이은의 은행장 취임과 더불어 주주와 자본금이 크케 늘어나 1901년에 주주가 24명에서 1905년에 51명으로 증가하였고, 자본금 5만 6천원도 모두 채울 수 있었다.

1906년 12월 7일부터 황족과 귀족 자제를 교육하기 위해 설치된 근대식 교육기관 수학원에서 강학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907년 3월 11일에 경운궁 중화전에서 관례가 행해졌다. 같은 해 8월 7일에 태황제 고종의 조서에 따라 순종의 황태자로 이은이 결정되었고, 8월 16에 대한제국 육군 보병 참위에 임명되었으며, 9월 7일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의친왕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은 황태자의 종형, 이강은 순종의 동생이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

1907년 10월 16일에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가 방한하자 순종과 함께 이은은 인천항에 갔으며, 요시히토와 동반하여 한성으로 돌아왔다. 요시히토가 한성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 숙소를 방문하였으며, 요시히토와 함께 창덕궁경복궁을 관람하였다. 10월 20일에 요시히토가 귀국하자 순종과 함께 인천항에 나아가 송별하였다.

 

환국과 사망

1954년에 대한민국에서 〈구황실재산처리법〉이 제정되어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을 모두 국유화하는 대신 황족의 직계와 배우자에게 매월 생활비가 지급되도록 하였지만 이은은 제외되었다. 1957년에 이구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이은과 이방자는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 때에도 대한민국 정부에 여권 발급을 요청하였지만 발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일본 여권을 사용하였다. 미국 뉴욕에서 체류하던 1959년 3월 16일에 이은은 고혈압에 의한 뇌일혈로 쓰러졌다. 왼발을 조금 저는 정도로 회복되자 같은 해 5월 17일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해 10월 25일에 미국 뉴욕에서 이구와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이 결혼식을 올렸다. 1960년에 미국에 가기 위해서 다시 여권 발급을 대한민국 정부에 요청하였지만 성사되지 않아 결국 일본으로 귀화하였다.

대한민국에서 4·19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출범하자 국무총리 장면은 이은에게 주영 대사직을 제안하였지만 이은은 건강상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은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통해서 민주당 정권의 불안한 입지를 확고히 다지겠다는 정치적 판단도 있었다. 새로운 대한민국 정부는 이은의 귀국에 호의적이었으며, 이은도 환국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1961년 5월에 이은은 이구가 머물고 있는 미국 하와이 주를 방문한 후에 일본으로 돌아왔는데 병이 재발하여 중태에 빠져 성 누가 병원에 입원하였다.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이은의 치료비와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1963년 5월에 상태가 악화되어 아카사카의 산노(山王) 병원에 입원하였다.

1963년 11월 22일에 이은은 혼수상태인 채 대한민국으로 환국하여 곧장 성모 병원에 입원하였다. 일본과 대한민국에서 가톨릭계 병원에 입원한 이유는 병상에 있던 1961년에 도쿄에서 가톨릭 신부의 권유로 영세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은의 영세명은 요셉이었다. 1963년 3월 22일에 이은이 제기한 국적취적신청에 대하여 서울지방법원에서 허가 결정이 내려져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다. 1964년 2월에는 휠체어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기도 하였지만 다시 상태가 악화되기를 반복하였다. 1970년 5월 1일 새벽 3시에 전신경련을 일으킨 채 의식을 잃었고, 오전 7시 30분에 성모 병원에서 창덕궁 낙선재로 옮겨져 오후 1시에 사망하였다.

 

사후

이은의 장례는 황태자의 예우를 받으며 9일장으로 치러졌다. 1970년 5월 9일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가톨릭의 영결 미사와 불교의 독경 의식이 있었고, 영결식이 대조전에서 거행되었다. 장례에는 일본 황실 대표로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가 참석하여 분향하였다. 이은의 대여는 황실이 세운 진명여자고등학교양정고등학교의 학생 3백여명이 옹위하였다.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현재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홍릉 동편에 안장되었으며, 원호는 영원(英園)으로 결정되었다. 시호는 의민(懿愍), 존호는 문인무장지효명휘(文仁武莊至孝明暉), 정식 시호는 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황태자(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皇太子)이나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결정한 사시(私諡)이다. 1973년 5월 6일에 이은의 신위(神位)를 종묘로 옮기는 부묘제(祔廟祭)가 거행되어 낙선재 혼전에 있던 신위가 종묘 영녕전 제16실로 옮겨졌다.

 

평가

이은이 대한제국의 황태자였음에도 일본 제국 육군에 복무하였고, 일본 황족과 결혼하였으며,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친일 논란이 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토의할 때 의열단 출신 입법의원 박건웅이 “동경의 이왕은 민족 반역자인데 왜 자살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인명사전 명단에서 제외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왕공족을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편찬위원회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논의 끝에 왕공족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지만 친일보다는 망국에 대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다만 기준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친일 행위가 있는 경우에는 수록대상자로 선정하기로 정리되었다”고 해명하였다. 이와 더불어 “왕공족은 대한제국 황실을 예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고안한 일본 황족과 일본 화족, 조선귀족 사이의 특수한 지위로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면서 “공족 중 이재면과 이준용, 이재곤, 이해승, 이재극 등 구체적인 매국행위를 일삼은 인사들은 친일 행적으로 사전에 수록되었으나 영친왕 이은과 이우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음을 감안하여 제외하였다”고 밝혔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56기로 일본군 대위로 복무하다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군 창설을 주도한 이형근은 1945년 8월 15일에 이은의 저택을 찾아가 만났는데 이은은 이형근에게 “동포들에게 사과 한 마디 못해 늘 미안하게 생각해왔다. 역대 왕들의 실정에 대해 내가 언젠가는 사과하고, 국가에는 독립을 수호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가 필수불가결하다고 호소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역임한 이홍직동경제국대학에 재학할 때 이은이 친용금의 일부를 내어 만든 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았었고, 장학금의 수혜를 받은 학생들로 구성된 이화회(李花會)를 조직하였다. 이은이 종묘 제사를 이유로 일시 귀국하였을 때 이홍직은 회원들과 함께 이은과 면담하였다. 당시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 정책을 시행하던 때였고, 일본인 사무관이 옆에 시립하여 있는데도 이은이 정확한 발음의 한국어로 근황을 묻고 대화를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이홍직은 자신의 억압된 울분이 그 날 이은의 태도로 풀렸으며, 이은도 민족의 얼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주일 공사를 역임한 김용주도 1949년에 경제사절단원으로 도쿄에 갔을 때 이은을 처음 만나 인품에 감탄하였으며, 평생을 일본에서 지내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은이 한국어를 능통하게 말하여서 탄복하였었다고 회고하였다.

서울신문의 기자로 활약한 김을한은 1971년에 《인간 이은》을 출판하면서 이은의 삶을 ‘끝없는 한, 마르지 않는 눈물’로 묘사하였다. 이 책의 초판 간행 당시에 시인이자 소설가 박종화는 〈영친왕을 위해 곡하다〉라는 시를 헌정하였고, 원나라의 볼모로 가서 노국대장공주와 정략결혼을 하였지만 고려로 돌아와 고토를 회복한 공민왕에 비유하며 이은이 조국 광복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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