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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선덕여왕때 건립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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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선덕여왕때 건립되다.

 

첨성대(瞻星臺)는 경주시 반월성 동북쪽에 위치한 신라 중기의 석조 건축물로, 선덕여왕때에 세워진, 현존하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위치 및 구조

첨성대는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월성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362개화강암 벽돌을 사용하여 원통형으로 축조하였다. 높이는 9.17미터. 돌로 27층을 쌓았으며, 꼭대기에는 다시 우물 정(井) 모양의 2층의 천장돌이 있다. 13층에서 15층에 이르기까지 정남향의 네모난 문이 있고, 이 문의 아래로 12층이 있고 위로 13층이 있으므로 첨성대 위아래의 중간에 문이 위치한다. 내부에는 12단까지 흙이 채워져 있고 여기에 사용된 돌의 수는 362개이다. 내부에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이 장대석을 이루고 있다.

 

보존상태

2005년 언론 등의 보도에 따르면 북쪽으로 7.2센티미터, 동쪽으로 2.4센티미터 정도 기울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전문가에 따르면 원인은 북동쪽 지반이 무르고 수분이 많은 탓으로 보고 있으며, 지역 주민들은 한국 전쟁 이후 기울어짐이 심해졌으며 당시 북쪽의 도로를 지나던 탱크 등에 의해 지반이 약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문화재청은 이에 대해 우려할 수준은 아니며, 국내외 연구진에 의한 연구 결과 또한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라고 밝히고 있다. 2016년 9월 경주에 발생한 지진의 여파로 첨성대 위쪽 돌이 탈각되었고, 2017년 1월 복구작업에 있지만 난항을 겪고있다.

 

용도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 구조물이 세워져 혼천의(渾天儀)가 설치되었으리라는 생각과, 개방식 ‘’으로서의 관측대라는 견해도 있다. 첨성대는 창문을 제외하면 어느 방향에서나 같은 모양이며, 계절태양의 위치에 관계없이 일구(日晷)를 측정하여 시간을 헤아릴 수 있으므로 4계절24절기를 확실히 정할 수 있다. 정남(正南)으로 열린 창문은 사람이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오르내리는 데도 쓰였지만, 춘·추분(春·秋分)에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이 창문을 통하여 태양광선이 바로 대(臺) 안의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출 수 있는 위치에 열려 있다. 그러므로 동·하지(冬·夏至)에는 창문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므로 분점(分點)과 지점(至點) 측정의 보조역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절기의 정확한 측정에 의하여 역법(曆法)을 바로 잡기 위한 측경(測景)을 목적으로 설립된 규표(圭表), 즉 측경대로서 일구를 측정하는 천문대일 뿐 아니라, 신라 천문관측의 중심지로서, 신라 천문관측에서 자오선과 동서남북 4방위의 표준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첨성대는 그 구조가 상징하는 바 하늘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 가설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의거하여 축조되었으리라고 해석되고 있으며, 27단으로 이루어진 것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임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천상(天象)의 이변(異變)이 있을 때 외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한 상설 천문대로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첨성대는 어떠한 저서를 참고하여도 별을 관측하였다는 직접적인 내용에 대한 묘사는 들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성대라 명명한 것은 첨성대가 세워진 이후 신라의 천체관측에 관한 기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첨성대를 별을 관측하였던 건축물이라는 이견이 있다.

 

건립 시점

첨성대에 관한 최초 기록인 <삼국유사>는 첨성대의 건립시점을 선덕여왕대(632~647)로 밝히고 있고, <삼국유사> 이후의 사서에서도 이에 반하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선덕여왕대(632~647년)에 첨성대가 건립된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정확한 건립시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 및 견해가 존재한다.

 

선덕여왕 2년(633)설:<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기록은 "唐太宗貞觀七年癸巳 新羅 善德女王 所築累石爲之"라고 했다. 당의 연호인 정관(貞觀) 7년은 계사(癸巳)년이며 633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준에 따르면 계사년은 선덕여왕 재위 2년(633)에 해당하지만,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선덕여왕 원년(633)에 해당한다. <세종실록지리지>가 첨성대 건립연도를 이와 같이 설정한 근거는 알 수가 없다. 만일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첨성대는 선덕여왕의 왕권강화를 위한 조형물일 가능성이 높다.

 

선덕여왕 초년설: 민영규(1981) 는 첨성대가 분황사(634), 영묘사(635), 황룡사구층목탑(645)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지지할 명확한 근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었으며, 다만 많은 학자들이 첨성대 건립시점을 선덕여왕 몰년(647)으로 보는데, 그렇게 볼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알천공, 김춘추, 김유신 등이 화려하게 선덕여왕을 보좌하고 있던 시절에 첨성대가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첨성대 선덕여왕 초기 건립설"은 "첨성대 선덕여왕 말기건립 부정설"로 볼 수 있다.

 

황룡사 구층목탑(645) 동시 건립설: 경주 첨성대는 직접적으로는 백제 천문대의 영향을 받아서 그와 비슷하게 축조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그 축조 연대에는 많은 백제의 건축기술자들이 초빙되어 황룡사(皇龍寺) 9층탑 등이 건립된 시기이며, 그로부터 얼마 후인 675년에는 백제 천문학자들의 영향과 직접 지도 아래 일본에도 점성대(占星臺)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백제에는 이미 같은 음(音)으로 불리는 천문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 천문대도 주비의 법(法)에 의하여 세워진 측경대였을 것이며, 그것이 신라에 영향을 주어 첨성대가 되었고 일본에 건너가서 점성대가 되었으며, 백제와 신라의 천문대는 당(唐)에 자극을 주어 723년에는 주공측경대(周公測景臺)의 재건(再建)을 보게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종석(2007) 은 "황룡사가 건립된 해에 축조된 첨성대도 이러한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또한 "첨성대 축조는 선덕여왕 646년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4년(645)에 착공되어 그해 4월 8일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인 선덕여왕 15년(646)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황룡사 구층목탑의 건립목적이 "대외적으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있었다고 보았으며, 첨성대의 건립목적이 "대내적으로 당시 종교적인 갈등과 혼란을 무마시키고 화합하려는 의지"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선덕여왕 말기(645~647)설: 김기흥 은 "분황사와 영묘사 그리고 황룡사9층목탑을 세운 바 있는" 선덕여왕이 "자신의 평생의 신앙과 소망을 엮어서 이 첨성대를 건축했던 것"으로 보았다. 즉, 첨성대 건립시점을 황룡사9층목탑 건립 이후로 본 것이다.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건립한 이유는 "첨성대를 통해 제석신이 이 땅에 강림하여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기를 고대"했기 때문에 혹은 선덕여왕이 죽은 후에 "도리천으로 환생하기 위한 통로"로 세웠을 것이라고 했다. 김기흥에 의하면 첨성대는 현실세계와 천상세계를 연결하는 상징적인 "우주 우물"이다.

 

선덕여왕 몰년(647)설: 다수의 학자들은 첨성대 건립시기를 선덕여왕 몰년으로 보는데, 주로 <증보문헌비고> 기록을 따랐다. 그런데 이보다 이전 기록인 <삼국사절요>에 비담의 반란 발생(647년 1월 7일), 첨성대의 건립,선덕여왕의 죽음(647년 1월 8일)이 차례대로 적혀 있다. 만일 첨성대가 선덕여왕 몰년에 건립되었다면 첨성대는 선덕여왕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일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면, 이는 곧 첨성대가 천문관측소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가 당으로부터 천문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통일이 이룩된 이후인 7세기 후반이다. 이는 <삼국사기> 新羅本紀, 文武王 14年, 孝昭王 元年, 聖德王 17年, 景德王 8年의 기록에 나타나는데, 문무왕 14년(674) 새로운 역법을 도입했고, 효소왕 원년(692)에는 당에서 천문도를 수입했고, 성덕왕 17년(718)에 처음으로 누각(漏刻: 물시계)과 누각전을 설치했으며, 경덕왕 8년(749)에 완공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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