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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덕종, 경복궁 자선당에서 요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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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덕종, 경복궁 자선당에서 요절하다.

 

덕종(德宗, 1438년 ~ 1457년 9월 20일 (음력 9월 2일)은 조선 초기의 왕족이자 왕세자(王世子), 작가이다. 세종의 첫 손자이자 세조의 장자이며 예종의 형이다. 월산대군, 성종 형제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정희왕후 윤씨이다. 1455년 세자(世子)에 책봉되었으나 2년 만에 20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사후 차자 성종이 즉위하면서 왕(王)으로 추존되었다. 바로 의경왕(懿敬王)에 추존되었다가 회간왕(懷簡王)으로 추존되고 뒤에 덕종(德宗)의 묘호가 올려졌다. 정식 시호는 덕종회간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德宗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이며 왕에 추존되기 전에는 의경세자(懿敬世子)로 불렸다. 이(李), 는 장(暲), 초명은 숭(崇), 현동(賢同), 자는 원명(原明), 본관전주(全州)이다.

 

초기 생애

1438년(세종 21년)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아버지 수양대군과 어머니 낙랑부대부인의 장자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세종대왕은 그에게 특별히 현동(賢同)이라는 이름을 친히 지어서 내려주었다. 나중에 어느 정도 자라자 이름은 숭(崇)이라 하고, 자는 원명(原明)이라 하였다. 그리고 관례를 올린 뒤에는 장(暲)으로 이름을 고쳤다. 1445년 8세에 정의대부(正義大夫)의 품계를 받았고, 도원군(桃源君)에 책봉되었으며, 성인이 된 뒤에 이름을 숭에서 장으로 개명하였다. 1450년에는 한확(韓確)의 딸 한씨와 혼례를 올렸다. 1453년 계유정난 때 공로로 흥록대부(興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해서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잔병이 잦았다.

 

세자 책봉

1455년 아버지 세조가 왕에 올라, 원자(元子)에 책봉되었다가 바로 세자(世子)에 책봉되었다.

1456년 2월 사육신 성삼문, 박팽년, 성승 등이 행사장에 별운검을 설치하여 자신은 물론 그의 아버지 세조, 동생 예종을 타살하려 하다 실패했다. 그 해 8월 세조의 명으로 행 태일전직(行太一殿直) 윤기(尹沂)·전 사직(司直) 신선경(愼先庚)·수의 교위(修義校尉) 권치명(權致命)의 딸을 뽑아 세자의 후궁인 동궁 소훈(東宮 昭訓)으로 삼았다. 그러나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본 자녀들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는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으며,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쾌유되지 못하였다.

 

죽음

1457년(세조 3년) 9월 20일(음력 9월 2일)에 20살의 나이로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은 가위눌림이라고 하나 불확실하다. 야사는 의경세자와 세조단종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문종현덕왕후의 원한을 샀다고 전하지만, 오히려 덕종이 단종보다 먼저 사망했으므로 이 전설이 허구로 추정된다.

그가 죽자 현덕왕후의 살을 맞고 죽었다는 도사의 말을 신봉한 세조는 형수 현덕왕후의 묘를 파내 시신을 쪼개고 강물에 던졌다. 또는 관곽을 강물에 던졌다고도 하는데, 관곽이 멈춘 곳의 주민들이 임시로 거두었다가 후에 다시 능으로 조성했다 한다.

 

사후

그가 죽자 그의 비 한씨는 수빈(粹嬪)으로 봉했고 궐내에서 살아도 좋다는 시아버지 세조의 배려에도 사가로 나가 살겠다며 출궁하였다. 수빈 한씨는 사저에서 불우한 세월을 보냈지만 한명회 등과 사돈이 되면서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왕(王)으로 올리는 묵계를 체결한다. 후에 둘째 아들 자을산군 혈성종(成宗)으로 즉위하면서 1469년부터 추숭여론이 나타났고 1470년 1월 왕(王)으로 추존되었다가 1475년 다시 대왕(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추숭과 추존

1470년(성종 1년), 1월 18일에 의경왕(懿敬王)으로 추숭하였다. 당시 태조 이성계의 아들이자 태종 이방원의 친형인 정종은 사후 시호가 없었고 종묘에도 배향되지 않았으므로 '정종(定宗)'이 아닌 '공정왕(恭靖王)'이라 불렀는데, 의경왕(懿敬王) 또한 그러하였다. 아내 수빈 한씨 또한 '왕대비(王大妃)'가 아닌 '인수왕비(仁粹王妃)'로 진책되었다. 이때 그는 왕으로는 추숭되었으나 종묘에는 배향되지 않았다. 당시 그를 왕으로 추존한 뒤 황고로 부르느냐 황백고로 부르느냐를 놓고 논란이 발생하였다.

1475년(성종 6년), 1월 6일에 의경왕(懿敬王)을 의경대왕(懿敬大王)으로 추존하였다.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춘추관(春秋館)에서 논의하여 올린 첫 시호는 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이었고 1월 21일(임술)에 최종적으로 예조(禮曹)에서 올린 시호가 회간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였다. 따라서 인수왕비(仁粹王妃) 또한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로 진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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