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 최씨, 영조의 생모, 희빈 장씨의 저주굿을 발고하다.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년 12월 17일(음력 11월 6일) ~ 1718년 4월 9일(음력 3월 9일))는 조선의 19대 왕 숙종(肅宗)의 총관후궁이자, 21대 왕 영조(英祖)의 생모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생애
충무위 부사과를 지내고 후일 증 영의정으로 추증된 최효원(崔孝元)과 남양홍씨의의 딸로서 1670년 12월 17일에 태어났다. 1936년 장봉선 등이 편찬한 정읍군지에 의하면 숙빈 최씨는 정읍현 태인면에서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랐다 한다. 그때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태인의 대각교에서 남루한 소녀를 발견하게 되었다. 민유중의 부인 송씨가 불쌍히 여겨 데려다 키웠고, 인현왕후가 왕비를 간택되어 입궁할 때 대동시켰다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숙빈의 고향은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 마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외할아버지 홍계남(洪繼南)이 한성 출신이었다 한다. 숙빈 최씨의 본관은 해주 최씨라고 하나 해주최씨의 시조 최온(崔溫)의 몇대 후손인가는 불분명하다. 숙빈의 직계조상은 할아버지 최태일, 증조부 최말정, 고조부 최억지의 이름이 전하지만, 이들은 해주 최씨 족보에 실리지 못했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7세 때 무수리로 궁에 입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최숙빈의 출신에 대한 이설 중의 하나로,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는 고종의 후궁 삼축당 김씨와 광화당 이씨가 고종에게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하여 숙빈이 본래 침방 출신이라는 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설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숙빈 최씨가 7살에 입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7살은 보통 궁녀들이 입궁하는 평균 연령대이고, 그렇기 때문에 최씨가 침방 나인으로 있었다는 설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아들 연잉군(영조)은 숙빈이 침방나인 시절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최씨가 처음 승은을 입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숙종 19년(1693년) 처음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고 그해 10월 6일 아들 영수(永壽)를 낳으나 영수 왕자는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해(1694년) 숙종의 특명으로 종2품 숙의(淑儀)가 되었고 그해 9월 13일 연잉군(延礽君) 금(昑)을 낳았는데 훗날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이다. 숙종 21년(1695년)에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고, 숙종 25년(1699년)에는 단종의 복위(숙종 24년(1698년) 기념으로 정1품 빈으로 봉해지면서 숙(淑)이란 휘호를 얻어 숙빈(淑嬪)이 되었다.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는 친분이 두터웠으며, 인현왕후의 사후 숙종에게 희빈 장씨의 저주굿을 발고하였다.일각에서는 희빈 장씨 사후 숙빈 스스로 왕비가 되고자 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신빙성이 없는 추측이다. 숙종이 후궁이 왕비가 되지 못한다는 국법을 만들지 않았다고 해도 숙빈은 다음 왕비 후보가 될 수 없었다. 숙종의 후궁 중에는 서인 명문가 출신인 귀인 김씨가 있었고, 만약 김귀인이 명문가 출신이 아닌 궁인 출신이었어도, 소생이 있는 숙빈 최씨가 왕비가 되면 차기 왕위계승서열에도 차질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빈 최씨, 귀인 김씨 모두 서인 세력이었고 서인에게 다음 정권이 돌아갔기 때문에 굳이 왕비가 되어야 할 사람이라면 자녀가 없는 명문가 출신인 귀인 김씨가 오히려 유리했을 것이다.
숙빈은 두 내전을 모실 때,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게을리하지 않았고 모든 비빈이나 궁인을 접할 때 공손하고 온화하여 숙종이 마음 속으로 애중히 여겼다고 한다. 인현왕후와 인원왕후 역시 특별한 대우를 했으나, 더욱 겸손하고 두려워하였고, 남의 장단점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아 옆에서 모시는 자들이 어쩌다 이런 일이 있으면 곧 꾸짖었다고 한다. 숙빈의 형제 중에 군문에 예속되었던 이들이 최씨가 왕의 후궁이 되자 직위를 사퇴하였는데, 숙빈이 조심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시켰다고 한다. 연잉군이 겨우 걸음을 배웠을 때에 숙종에게 나아가면 반드시 무릎을 모아 앉고 물러가라는 명 없이는 하루 해가 다 가더라도 어려워하는 빛이 없었는데, 숙빈은 연잉군이 오래 꿇어앉느라 발이 굽을까 염려하여 넓은 버선을 만들어서 힘줄과 뼈를 펼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숙종의 후궁들 중 영빈 김씨(寧嬪金氏)와 사이가 가까웠는데 영빈은 영조가 어릴 적 그에게 음식을 먹여주기도 했고 영조 또한 영빈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숙종이 희빈 장씨 사사 후 계비가 입궁하기 전인 1702년 5월 숙빈을 궁 밖으로 출궁시켜버렸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숙종 30년(1704년) 4월17일자 기사에 '연잉군(延礽君)의 어머니 숙빈(淑嬪) 최씨(崔氏)는 이현(梨峴)에 갑제(甲第)가 있는데'라는 글이 등장한다. 숙종 재위 당시, 후궁으로 책봉되면 궐 밖에 사제를 지어 주는 것은 흔히 있던 일이었다. 숙종의 또다른 후궁 유씨(소의 유씨)는 숙원으로 책봉된 후 전택 매입에 소요되는 값이 6천 금(金)에 이르렀고, 숙원 박씨(명빈 박씨)의 궁에서도 강원도 춘천의 땔나무 터를 점유하는 일이 있었다. 때문에 대사간 이희무(李喜茂)는 '선왕조에서는 후궁의 제택을 별도로 두지 않았는데 정해진 제도를 준수하여 분에 넘치는 일이 없게 하라.'고 간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숙종 37년(1711) 6월 22일 두번째기사 '옛날의 이현궁(梨峴宮)은 곧 지금의 숙빈방(淑嬪房)이다.'에서 숙빈방을 근거로 그전에 숙빈최씨가 궐을 나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또한 확실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 희빈장씨를 뜻하는 장숙원방이라는 표현이 나오며 숙종의 후궁인 귀인김씨도 김숙원방이라는 표현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또한 비변사등록 1708년 12월 30일 자료에 그때까지 궐을 나간적 없는 영빈김씨의 영빈방과 연령군방이란 표현이 존재하는것을 보아 숙빈방이란 표현은 단순히 숙빈최씨 소유의 자산 또한 창고를 뜻하는 바일 가능성이 크다. 능원대군(綾原大君)의 옛 집인 이현궁(梨峴)은 최씨가 숙의(淑儀)였을때 그녀의 제택으로 정해졌는데, 숙종은 처음에 이현궁(梨峴宮)을 최씨의 사제로 삼았다가 신묘년(1711년)에 그녀의 아들 연잉군의 제택으로 정하며 내사로 예속시켰다. 또한 영조는 숙빈 최씨가 1702년 궁 밖으로 출궁당했다는 설을 확실하게 부정하고 있으며, 임방이 지었다는 숙빈 최씨의 제문 역시 숙빈 최씨의 1702년 궁 밖 출궁설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두 기록 모두 공통적으로 숙빈최씨가 말년에 궐에서 숙종을 간병했다고 하며 말년에 궁을 나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후
숙빈은 병신년(숙종 42, 1716년)에 병환이 들어 사가로 나아가 치료하라는 숙종의 명으로 3년동안 사가에 머물렀다. 그녀는 오래도록 임금과 왕비의 안후를 거르게 됨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졌고, 조금만 차도가 있으면 곧 대궐로 갔다고 한다. 무술년(숙종 44, 1718년) 3월 9일 무오일에 창의동 사가에서 49세로 사망하였다. 세 내전(왕, 왕비, 동궁)에서 중궁의 관원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하되 부의가 특별히 두터웠고, 이 해 5월 경신일에 양주의 고령동 옹장리 서쪽 언덕에 예장(禮葬)으로 장사를 지냈다.
그녀의 아들 연잉군은 왕세제를 거쳐 왕으로 등극하니, 바로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英祖)이다. 영조는 즉위 원년, 어머니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영조20년(1744년) 육상묘(毓祥廟)라고 올렸다가 다시 영조 29년(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육상궁은 현재 칠궁에 합사되어 있다. 묘소 또한 영조 20년에 소령묘(昭寧墓)라고 올렸다가 29년에 소령원(昭寧園)으로 다시 승격시켰으며, 사당과 무덤에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함께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렸다. 후일 여러 차례에 걸쳐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의 존호가 더 올려졌다. 영조 29년 육상궁에 관제(官祭)를 지낸 후, 명나라 효종(孝宗)이 생모를 추존하여 모비(某妣)라 하였다가 다시 황모(皇母)라고 칭한 예에 따라 숙빈은 왕의 사친(私親)이 아닌 선비(先妣)로 정호되었다. 영조는 살아생전 '사친은 항상 소심(小心)하고 신중하였다.'고 자주 회고했다. 영조 49년, 용강의 박흥조가 신문고를 울려 소령원을 능으로 봉하는 일을 청했으나 식량을 주어 쫓아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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