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헌황귀비 엄씨, 고종의 시중을 들다 총애를 받아 영친왕 은을 출산하다.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년 2월 2일/음력 1월 5일 ~ 1911년 7월 20일)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후궁이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 황비로 책봉되었다. 8세에 입궐하여 을미사변 직후 고종의 시중을 들다 총애를 받아 영친왕 은을 출산하고 이후 상궁에서 귀인으로, 순빈을 거쳐 순비가 되었다가 1903년에는 황귀비가 된다.
일설에는 계비란 말을 쓰기도 하는데 계비란 정식으로 책봉된 두 번째 정궁(正宮)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황후가 아닌 황귀비에 책봉된 순헌황귀비에게는 옳지 않은 칭호이다. 본관은 영월이며 1854년 1월 5일 서울에서 증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맏딸로 태어났다. 1905년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을, 1906년 사립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를 용동궁[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79번지]에 설립하였다. 초대 교장에 이정숙 여사가 취임하였고 1909년 5월 1일 숙명고등여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11년 사립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현 숙명여자중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출생
1854년 음력 1월 5일 / 양력 2월 2일 한성부 서소문방 서소문에서 평민인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엄재우(嚴載祐)는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자헌대부 의정부참찬에 증직되었다. 할아버지 엄재우의 증직은 양 남동생 엄준원의 출세로 추증된 직위이고, 아버지 엄진삼의 직책인 의정부 찬정은 사후 증직된 것이다. 가세가 빈한하던 그는 나이 8세 때에 궁녀가 되어 입궐하였고, 경복궁의 나인으로 배치되었다.
아버지 엄진삼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큰아버지 엄진일의 아들이자 그의 사촌 남동생인 엄준원이 아버지의 양자가 되었기에 진명학원(진명여자고등학교)의 창립자인 엄준원은 그의 양 남동생인 셈이다.
입궐 초기
이후 명성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있었으며, 명성황후 생전인 1885년 31세에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가 명성황후에게 발각되면서 궁궐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을미사변 이후 다시 입궐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아관파천 때는 고종을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같이 생활하였으며, 1897년 황자 은(垠, 의민태자)을 낳고 이틀 후 정식으로 귀인에 봉작되었다. 이후 순빈, 순비로 차례로 진봉되었고, 나중에는 황귀비로 봉해졌다.
이준용은 일본 망명 직후부터 엄상궁의 빈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어 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대체할 인물로 엄상궁을 택하고 그녀를 황후로 격상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접한 이준용은 망명 한인들에게 이를 알리며 반대 운동을 준비한다.
이준용과의 갈등과 빈 책봉
1899년 4월 이준용은 일본망명객들이 벌인 엄상궁의 황후책봉에 대한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는 유길준, 권동진, 조중응 및 기타 2~3인과 함께 논의한 결과 신분이 낮은 엄상궁을 황후로 삼는 것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조치라는 이유를 들어 엄상궁의 황후 책봉을 반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를 담아 궁내부대신 이재순에게 충고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이준용은 엄상궁의 출신 성분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왕실의 위신에 관련된 문제라며 엄상궁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였다.
또한 이준용은 아버지 흥친왕에게 서한을 보내 엄상궁 같은 미천한 소생이 황제의 총애를 얻은 것을 기화로 간신배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엄상궁을 황후로 책봉하려 기도하고 있으니, 이러한 때에 황실에 관계된 이들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준용이 엄상궁의 황후 책봉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것은 엄상궁이 자신의 아들 황자 이은의 권력 승계를 위해 일본에 망명중인 이준용과 이강 등을 극력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 이준용의 엄상궁 황후 책봉 반대운동은 도리어 그의 신변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엄상궁과 그의 측근들은 고종에게 이준용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고했고, 명성황후의 암살에 이준용이 개입되었다고 확신하던 고종은 이준용 제거를 결심한다.
이준용의 강한 반대와 국내 종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 은의 출산 직후 상궁에서 귀인(貴人)이 되고 1900년 순빈이 되었다. 1901년에 비(妃)로 진봉되고, 1903년에는 황귀비(皇貴妃)로 책봉되었다.
아들 은의 황태자 추대 노력
순종에게 아들이 없었고 그가 심하게 병약했다는 점 때문에 엄귀비는 자신의 아들 황자 은을 황태자로 올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를 안 의친왕이 반발하면서 의친왕과도 갈등하게 된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
생애 후반
아들 영친왕을 순종의 태자로 만드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영친왕은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이 황태자 사부(師父)라는 명목 하에 일본으로 인질로 데려갔다. 아들 영친왕이 일본의 사관학교에서 고된 훈련을 받는 도중 점심을 주먹밥으로 먹는 장면을 촬영한 필름을 보게 되었는데, 이를 보고 애통해하다가 먹던 떡이 급체하기도 했다 한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귀비로 불렸다.
1905년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을, 1906년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와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를 세웠다. 1911년 7월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7월 20일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향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아들 영친왕은 일본에 체류중이었다. 사망 후 순종에게 사시격인 '순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사후
양주 천수산(天秀山)에 안장되었고 묘호는 영휘원이라 하였다. 후에 그녀의 생전에 얼굴을 못본 장손 이진이 갑자기 독살당하면서 그녀의 묘소 건너편에 안장되었다. 위패는 칠궁에 추가로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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