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금성전투, 공산전투, 고창전투, 운주성 전투, 신검의 정변
금성 전투
견훤은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을 석권하고 후백제를 선포한 이듬해에 진출방향을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으로 돌려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견훤으로부터 비장의 지위를 받기도 했던 양길은 899년 7월에 궁예를 치기 위해 국원경 등 10여 성의 성주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쳤으나 거꾸로 비뇌성 아래에서 패하고,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선포하였다.
903년에는 수군 기습에 의해 금성(錦城,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빼앗겼다. 906년에는 상주 사화진 일대에서 패전하였다. 907년 견훤은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을 장악하였다.
금성을 후고구려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후방이 고려에 노출됨과 동시에 바다를 통해 중국과 사신을 주고받던 후백제로서는 자칫 사신 통교가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으로 후백제로서는 큰 손해였다. 실제로 909년 영광군 염해현(鹽海縣) 앞바다에서 견훤이 오월에 보내는 선박이 왕건에게 나포되어 후백제의 사신은 물론 가지고 있던 물건들까지 모두 빼앗기기도 했다. 나아가 왕건이 이끄는 2,500여 명의 수군은 진도를 지나 고이도를 장악하였다. 909년부터 910년까지 견훤은 나주를 놓고 마진(摩震)과 육지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는데, 910년에는 견훤 자신이 몸소 보기 3천을 거느리고 열흘 동안 나주를 포위하기도 했다. 왕건의 선단은 911년에 나주를 거쳐 무진주로 진격했지만, 견훤의 사위였던 지훤에게 막혀 물러나야 했다. 912년 덕진포(德津浦)에서 왕건(王建)의 화공에 패하고 견훤 자신은 겨우 작은 배를 타고 도주하였다고 한다.
한편 918년 6월에 태봉(泰封)에서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로 바꾸자, 견훤은 일길찬 민합(閔合)을 축하사절을 보내 공작의 깃털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왕건에게 선물로 보냈는데, 한편으로 오월에도 즉각 사신을 보내 말을 바쳤고, 오월은 답례로 견훤에게 중대부(中大夫)의 벼슬을 더해주었다. 궁예 휘하의 이흔암이 지키고 있던 웅주(熊州)는 이흔암이 철원(鐵圓)으로 상경한 사이 운주(運州) 등 10여 개 주현과 함께 후백제에 귀부하였다. 9월에는 상주의 적수(賊帥) 아자개(阿慈蓋)가 왕건에게 항복하고 있다.
신라 방면에 대한 공략
920년 9월에 견훤은 다시 아찬 공달(功達)을 고려에 보내어 다시 공작의 깃으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 화살을 바치며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고서, 10월에 대야성에 이어 구사성(仇史城)까지 함락시켰고, 다시 곧 진례성(청도군)으로 진격하였으나 신라가 고려에게 구원을 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한다.
921년 여름에 도선의 제자인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가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후백제의 수도 완산에서 멀지 않은 임피군에 도달했고, 이때 견훤은 경보를 맞아들여 남복선원(南福禪院)으로 올 것을 청했다가 다시 경보가 스승의 옛 거처인 백계산 옥룡사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해 말에 후백제의 궁창과 명권이 고려로 투항하고 있다.
924년 7월에 견훤은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의성) 두 성의 군사로 조물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들은 고려에서 구원군으로 보낸 애선과 왕충을 전사시켰지만, 조물성 사람들의 농성으로 성을 함락하는 데는 실패했다. 견훤은 8월에 절영도(絶影島)의 총마 한 필을 왕건에게 보내고 있다(후술). 한편 신라에서는 경명왕이 죽고 경애왕이 즉위하였으며, 925년 9월부터 발해에서 대규모 망명자들이 고려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10월에 견훤은 다시 3천 기(騎)를 이끌고 친히 조물성을 내습하였고 왕건은 반격에 나섰지만, 결판을 내지 못한 채 왕건측이 먼저 화친을 청했고 서로 왕건의 사촌아우 왕신(王信)과 견훤의 외조카 진호(眞虎)를 인질로 교환함으로써 화친이 성립되었다. 12월에 견훤은 다시 거창 등 신라의 20여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후당으로부터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 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 백제왕 식읍 2천 5백 호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고려와의 전쟁
926년 음력 4월 고려에 볼모로 보낸 조카가 급사하였다.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왕신을 죽이고 웅진 방면에서 진격하였다. 왕건이 웅진 방면의 성주들에게 성을 고수할 것을 명하여 견훤은 웅진 방면에서는 큰 소득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전투에 앞서 견훤은 자신이 보냈던 절영도의 총마를 돌려달라고 고려에 요구하였다. 이는 견훤이 “절영도의 명마가 고려에 가면 백제가 멸망한다”는 도참을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궁예나 왕건만큼은 아니지만 견훤 역시 도참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산 전투
927년 정월에 왕건은 후백제의 세력권인 용주(龍州)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고, 견훤은 후백제에서 죽은 왕신의 시신을 고려로 송환하였다. 3월에 고려는 다시 운주성주 긍준(兢俊)의 군을 격파하고 이로부터 사흘 뒤에 근암성을 함락시킴으로서 죽령의 길뿐 아니라 계립령의 길을 장악하였다. 4월에는 고려의 수군장군 영창, 능식이 강주(康州)를 공격하기 위해 남해안에 상륙하여 전이산, 노포평, 서산, 돌산을 쳐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사흘 뒤 왕건이 웅주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지만, 7월에 고려의 장수 재충, 김락(金樂)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장군 추허조 등 3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강주의 북쪽인 대야성이 함락됨으로써 고려는 강주로 가는 길을 열었고, 8월에 왕건이 강주를 순행하고 있다. 이 순행에서 또한 고사갈이성 성주 흥달을 비롯해 흥달을 감시하기 위해 견훤이 현지에 파견했던 후백제 관리들까지 고려에 투항하였다. 고사갈이성의 고려 귀부는 고려가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수운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수운교통로를 끊기 위해 9월에 견훤은 근품성을 쳐서 파괴하고 고울부(영천)을 함락시켰다. 당시 친고려 정책을 펼치던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은 연식을 보내어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왕건은 시중 공훤 등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견훤은 왕건의 군이 오기도 전에 단숨에 서라벌로 단숨에 들이닥쳤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사로잡아 협박, 자살케 했으며 경애왕의 왕비를 강간하고 부하들에게 궁녀들과 간음케 하였으며 병사들을 풀어 약탈을 마음대로 하고 장인들과 병기, 보배들을 약탈하여 돌아갔다고 적었다. 또한 왕의 외종제인 김부(金傅)를 새 왕으로 임명하였는데, 견훤 자신은 왕건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이때의 일을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족하(태조)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고 메추라기가 매의 날개를 찢으려는 것과 같아,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종사(宗社)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었기에, 내가 먼저 조적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금호의 도끼를 휘둘러서, 백관들에게는 밝은 해에 맹세코 6부를 의리 있는 풍도로 설득하리라 했는데, 뜻밖에도 간신은 도망가고 임금(경애왕)께서는 돌아가셨으므로 하는 수 없이 경명왕의 표제이며 헌강왕의 외손 되시는 분을 받들어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니, 위태로운 나라가 다시 세워졌고 없던 임금이 다시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동수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왕건과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 백제측은 대승리를 거두었고 왕건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신숭겸ㆍ김락 등 고려의 여덟 장수가 백제군에게 죽어 지역의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 하며, 주변 지명엔 왕건의 다급한 상황을 전해주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전투를 공산 전투 혹은 동수대전이라고 한다. 이 대승리를 통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견훤은 같은 달 대목군(칠곡군 약목)을 탈취하고 곡식을 불사르거나 거두어갔다. 소목군(구미시 인동)에도 역시 마찬가지 일을 다음 달에 행하였다. 11월에는 벽진군(성주)을 공격하여 장군 색상을 전사시킨다. 이렇게 다시금 서라벌로 가는 길이 확보되었고, 또한 남으로 강주까지 늘어진 고려군의 허리는 잘리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11월 7일에 오월에서 반(班)씨 성을 가진 상서가 도착해 고려와 후백제가 서로 화친할 것을 권하는 오월왕의 조서를 전했는데, 이 조서를 베껴 왕건에게 보내면서 견훤은 따로 왕건에게 보내는 글을 지어 함께 보냈다. 이 글은 최승우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앞서 고려군을 상대로 거둔 전승들을 열거하면서 승패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는 한편으로 "내 활을 평양성의 문루에 걸고 내 말에게는 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할 것이다"라고까지 하는 등 자신감을 드러내는 견훤에게 928년 정월 왕건은 다시 장문의 답장을 보내 마찬가지로 고려가 후백제를 상대로 거두었던 전승 사실들을 열거하며 "아직 승패는 알 수 없다"며 응수하고 있다.
928년 1월에 강주를 구하러 가던 고려의 원윤 김상과 정조 직량 등이 초팔성(합천 초계)에서 성주 흥종에게 공격받아 전사했으며, 5월엔 강주의 원보 진경 등이 고자군에 양곡을 운반하러 간 사이에 견훤은 강주를 습격하여 진경의 군 3백여 명이 전사하고, 장군 유문 등은 항복하였다. 왕건은 공격방면을 전환하려 시도하는 가운데 4월에 탕정군(아산)으로 진출하였고 7월에는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후백제군에 패배하고 청주로 퇴각하였다. 후백제군은 청주를 공격했으나 탕정군에서 지원군을 거느리고 출정한 유금필의 반격으로 3백여 명이 포로로 잡히고 독기진까지 물러났다.
왕건은 8월에 충주(忠州)로 이동하여 다시 경상북도 일대의 전선을 노리기 시작하였으며,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에 맞서 왕건은 명지성 원보 왕충으로 하여금 관흔을 쫓아내게 했으나, 관흔은 퇴각하여 대야성을 다시 차지하고 대목군의 벼를 베었으며 죽령 인근의 오어곡에 군사를 주둔시켜 죽령을 봉쇄하였다. 이에 왕건은 왕충 등에게 조물성 일대의 정찰을 명하고 있다.
10월에는 후백제군이 무곡성(군위 악계)를 함락시켰고(《삼국사기》) 11월에는 견훤 자신이 정병으로 오어곡성(《고려사》, 《삼국사기》에는 부곡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고려군 1천 명을 죽였으며, 이 무렵에 고려의 장군 양지와 명식 등 6인이 항복해왔다. 《고려사》는 이때 왕건이 군사들을 왕궁 구정에 불러모으고 양지와 명식 등 여섯 장수의 처자를 군사들 앞에서 조리돌린 뒤 저자에서 처형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고창 전투에서 운주성 전투까지
경상도 일대의 친고려 호족들을 토벌하기 시작한 견훤은 서부에서도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는데, 929년에는 고려로부터 나주를 다시 빼앗아 장악하고, 김훤, 애식, 한장 등에게 청주를 침공하게 하였으나 유금필에게 패하였다(《고려사》 유금필열전). 7월에 견훤이 친히 갑사 5천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쳐서 성주 홍술을 죽였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양손을 모두 잃었다"며 비통해 했다고 한다. 나아가 후백제군은 10월에 고사갈이성 공격을 시도했고(《고려사》)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12월에는 대군으로 고창군(안동)을 포위하였다.
930년 1월에 왕건은 병산에,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여 대치하였다. 대회전이 있었고, 이 회전에서 견훤은 대패하여 전사자만 8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유금필이 저수봉으로부터 내려와 분투하여 고려군이 대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튿날 잔병으로 견훤은 순주성(안동 풍산)을 공격하였고, 장군 원봉이 도주하자 백성을 거두어 완산주로 퇴각하였다.
이 패배로 견훤은 경상도 일대에서의 패권을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930년에 대거 고려로 돌아서게 되며, 신라또한 931년에 왕건을 서라벌로 초대하였다. 이후 견훤은 다시는 경상도 전역에 대해서 결코 패권을 확보하지 못한다.
932년 6월에 매곡성(청원)의 성주이자 견훤의 심복이었던 공직이 고려에 투항하였는데, 공직은 왕건을 부추겨 7월에 일모산성(연산군)을 공격하게 했지만, 성은 11월에야 함락되었다. 공직이 항복하자 견훤은 완산에 남아있던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한 명을 잡아다 친히 국문하고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9월에는 후백제의 일길찬 상귀가 수군으로 고려의 염주, 백주, 정주의 수군을 궤멸시키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 필을 약탈하였으며, 10월엔 해군장군 상애가 대우도(평북 용천)를 침략해 고려의 대광 만세를 패퇴시키기도 했는데, 이들은 당시 곡도로 귀양 와 있던 유금필에게 몇몇 지점에서 저지당했다. 933년 5월엔 견훤의 맏아들 신검을 통군으로 하는 후백제군이 혜산성과 아불진을 공략하였지만 거꾸로 유금필에게 격파당했다(《고려사》).
934년 9월, 왕건이 운주로 진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견훤은 갑사 5천으로 운주로 진군해 "양군이 서로 싸우는데 세를 온전하게 갖추지 못하여 무지한 병졸들이 많이 살상될까 걱정입니다.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자 영토를 보전하도록 해야겠습니다."라며 왕건에게 화의를 청했지만, 고려는 대장군 유금필이 나서서 후백제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사이에 후백제군을 쳐서 패배시키고 후백제측의 술사 종훈과 의사 훈겸, 용장 상달과 최필, 시랑 김악을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전장 부근의 웅진에 속한 30개 성마저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후사벌과의 전투
929년에는 박언창을 공격하여 후사벌국을 멸망시켰다. 917년 신라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후 사벌대군 박언창은 스스로 왕을 칭하고 나라를 세워 자치정권을 운영하였다.
신검의 정변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빼어나다 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맏아들로 군무에 경험이 많던 신검, 그리고 변방에서 도독직을 역임하여 역시 군무에 경험이 많던 것으로 보이던 양검 · 용검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양검과 용검은 각각 강주도독과 무주도독으로서 군을 이끌고 나가 있었고 신검만 완산주에 남아 있었는데, 이찬 능환이 양검 및 용검과 음모를 꾸며 군을 움직였고, 이어 파진찬 신덕 및 영순과 더불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935년 3월, 견훤의 나이 69세 때의 일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신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던 때의 모습에 대해,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혼미한 상태에서 멀리 대궐의 뜰에서 고함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은 견훤이 "이것이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고, 신검이 견훤에게 "왕께서 연로하시어 군무와 국정에 혼미하므로 맏아들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에 여러 장수들이 축하하는 소리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곧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어 파달 등 장사 30명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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