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왕,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암살되다.
경애왕(景哀王, ? ~ 927년, 재위: 924년 ~ 927년)은 신라의 제55대 왕이다. 성은 박(朴)씨, 이름은 위응(魏膺)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신덕왕(神德王)의 둘째 아들이며 경명왕(景明王)의 아우이다.
927년 후백제 군주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 계림대군 박순현(鷄林大君 朴舜玄)은 경주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다.
생애
경애왕이 왕이 될 무렵, 신라는 재정적으로 몹시 가난한 상태였으며, 고려, 후백제의 압박으로 영토는 계속 줄어들었다. 경애왕은 고려와 동맹을 맺어 세력 회복을 목표로 하였지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王建)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5년 고울부장군(高鬱府將軍) 능문(能文)이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 (지금의 진주시 일대)를 다스리던 왕봉규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은 전쟁을 잠시 중단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견훤이 볼모로 보냈던 진호가 고려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926년 후백제는 고려를 다시 공격하였다.
927년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군대에게 붙잡혔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삼국유사등을 토대로 볼때, 신빙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어서, 신뢰하기 어렵다. 첫 째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시를 음력 11월로 기록하고 있는데, 음력 11월이면, 양력으로는 12월에서 1월 정도에 해당하므로 초겨울 또는 한겨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누가 보더라도, 그런 엄동설한에 야외에서 주연을 즐겼다는 내용은 말이 되지 않는다. 둘 째로 화랑세기에 따르면, 지금의 포석정이라고 불리는 곳은 본래 포석사라는 사당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이 곳은 원래 화랑이었던 문노의 화상이 모셔진 사당이라고 전해지는데, 문노의 화랑도는 호국선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셋 째로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기술된다는 것이다. 특히 후삼국에 대한 기록을 보면, 태봉을 세웠던 궁예가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쫓겨난 뒤 보리이삭을 베어먹다가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당시 태봉국의 도읍지 였던 철원의 경우, 현재까지도 민간과 지자체인 철원군에서 궁예가 세웠던 태봉국을 기념하기 위하여 태봉제를 전승해 오고 있는 점을 볼때, 궁예가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기록역시 사실여부에 대한 의문점이 있다. 이렇듯 역사의 기록이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기에, 역사서에 기술되어있다는 것 만으로 이를 사실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여러가지 점을 종합해 보면, 경애왕은 주연을 즐긴것이 아니라, 문노를 모신 사당인 포석사에서 나라의 안위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견훤은 경애왕에게 자살을 강요하여, 결국 경애왕은 자살하였고 그의 이종 6촌 동생 김부가 경순왕으로 보위를 승계하였다.
한편, 경애왕 때 황룡사에 백좌경설(百座經說)을 설치하고 선승(禪僧)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을 백좌통설선교(百座通說禪敎)라 부르며, 대규모 선승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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