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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실각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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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실각되다.

 

이인임(李仁任, ? ~ 1388)고려 말기의 간신(奸臣), 권신權臣)이자 시인(詩人)이었다.

그는 이성계의 최대 정적 중 하나였다. 그는 한때 신돈(辛旽)의 문하에 있었으며, 홍건적원나라의 최유 등을 물리쳤고,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실각되었다. 이성계의 사위 이제의 백부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경상북도 출신이다. ()는 승암(勝巖)이며 시호(諡號)는 황무(荒繆)이다.

 

생애

고려 경상도 성주군 고령현 성산면(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에서 대제학 이조년의 손자로 태어난 기록만 알려져 있는데 할아버지는 성산군 이조년(李兆年)이고, 아버지는 성산후 이포(李褒)이다. 본관은 성주로 이포의 아들은 이인복(李仁復)·이인임(李仁任)·이인미(李仁美)·이인립(李仁立)·이인달(李仁達)·이인민(李仁敏)이다. 이인임은 경상도 성주군 고령현 성산면에서 이포(李褒)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이인복의 동생이자 이인미의 둘째 형으로 고려 멸망 후 은거한 도은 이숭인5촌 당숙이기도 하다. 음보(蔭補)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되고, 전법총랑(典法摠郞)을 거쳐 공민왕 초에 좌부승선(佐副承宣)으로 승진했다. 1359(공민왕 8) 서경존무사에 임명되어 평양으로 부임하였고, 그해 숙부 이승경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을 막았으며, 1등 공신에 올랐다.

1364(공민왕 13) 최유(崔濡) 등이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고려에 쳐들어오자 서북면 순문사(西北面 巡問使) 겸 평양윤(平壤尹)으로 이를 격퇴했고, 1368(공민왕 17)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의 동녕부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한때 신돈(辛旽)의 문하에 있다가 신돈이 살해된 후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1374(공민왕 23) 수문하시중에 임명되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해 공민왕이 시해되자 공민왕을 죽인 홍윤, 최만생과 그 일파를 모두 처형하고 왕족으로 대통을 잇게 하려는 명덕태후(공원왕후)의 뜻에 반하여 공민왕의 유일한 아들인 모니노를 우왕으로 추대하여 정권을 잡았다. 정권을 장악한 후에는 권문세족의 수장으로서 친원 정책을 견지하여 친명 정책을 주장하던 신진사대부들과 개혁 세력의 관료들을 추방했고, 10년간 우왕을 직접 섭정했다.

그 후 지윤(池奫), 임견미, 염흥방(廉興邦) 등 심복들을 요직에 앉히고 토지를 수탈하는 등 탐학을 자행하게 두었으며, 문하시중 경복흥을 도당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참소하여 귀양보냈다. 그 후 노쇠하여 우왕에게 사직을 청하였지만 우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영문하부사, 영삼사사, 영중방 사헌 개성부사에 임명되었다가 1386(우왕 12)에는 좌시중이 되었고 이듬해 노병으로 은퇴하였다.

그가 은퇴한 이후 그의 일파였던 임견미, 염흥방 등은 탐학과 부패를 더욱 극악무도하게 일삼아 고려 조정의 몰락을 초래했다. 결국 1388 이러한 횡포에 분격한 최영, 이성계 등에 의하여 그의 일당이 축출되었다. 임견미, 염흥방, 반복해 등은 참수 되었고, 이인임은 최영의 건의로 경산부에 안치되었으며 나중에 이성계, 정도전 등에게 부관참시 당했다. 시호는 (황무)이다.

 

사후 사건

명나라 법전 및 역사서로 알려진 대명회통(大明會通)에서 조선 왕조의 계보를 작성하던 도중에 이인임을 이성계의 부친(실제 부친은 쌍성총관부의 유력자인 이자춘)으로 기입하여,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발생하였다. 1518(중종 13) 무인(戊寅)해에 좌찬성 이계맹(李繼孟, 1458(세조 4)~1523(중종 18)을 주청사로 보내 대명회통(大明會通)에 이인임(李仁任)과 단(, 태조 이성계의 본명)이 고려 사왕(四王, 공민, , , 공양)을 시해하였다는 잘못된 기록까지 확인했다. 이러한 외교적 마찰은 종계변무(宗系辨誣)로 이어져 남곤(南袞)이 주청사로 가서 시정을 요구하는 등 중종 때만 해도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가 1584(선조 17) 종계변무주청사 황정욱(黃廷彧) 등이 가서 정정키로 확정을 보고, 1588 유홍(兪泓)이 고쳐진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가지고 돌아와 일단락되었다. 결국 명나라 만력제 치세에 이르러서야 개정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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