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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건청궁, 슬픈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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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  슬픈 역사의 현장

 

 

 

 

 

 

건청궁은 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슬픈 역사의 현장이에요.

건청궁을 들어설때면 가슴 한켠이 찌릿하게 아려오는 것은 아마도

이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건청궁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를 갖춘 구조로 사대부의 집과 흡사한 느낌이에요.

화려하지도 않은데다가 궁이라고 말하기에는 작다는 생각도 듭니다.

 

건청궁은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를 봉안한다는 명분 아래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고종 10년에 지어진 궁이에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서쪽에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태원전을 지은 것으로 보아 새로운 어진 봉안 시설이 필요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아마도 임시거처나 휴식공간으로 삼았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건청궁은 임금의 침전이나 편전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한가로이 쉴 수 있기로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하지만 국정에 임하는 임금의 긴장김이 풀릴 수도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아들 고종을 건청궁에서 한가로이 쉬게 하고

자신이 섭정을 계속하려는 속셈이었는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흔히 말하기를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권력에 맞서 친정체제의 상징으로

'아버지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기만의 궁전을 지었다고 하지만

<고종실록>의 기사는 사뭇 다릅니다.

 

부호군 강진규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듣건데, 건청궁을 짓는 역사가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합니다. 이곳은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은데

그토록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서 어디에 쓰려고 경비를 지나치게 낭비하는 것입니까?"

(고종실록 1873년 5월10일)

 

좌의정 강로가 아뢰기를 '재상 강진규의 상소문에 대한 비답을 보곳서야 비로서 건청궁을

짓고 있으며 대내에서 그 경비를 대고 유사에 맡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대로합하(대원군)의 말씀을 듣고 나서 어진을 봉안하는 곳으로서 칸수가 매우 적고

그 규모도 화려하지 않을뿐더러 또한 공한지의 좋은 자리이므로 대로 합하께서 조치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신들은 모두 사체로 보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멀리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그 내막을 모르고 틀림없이 10년간 토목공사를 하다가

또 이 공사를 벌이고 있으니 공사가 끝날 날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고종실록 1873년 8월19일)

 

 

대원군은 최익현의 "자기 자리가 아닌데도 국정에 간여한 자" 라는 상소로 운현궁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그로인해 고종은 비로소 왕권을 행사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친정을 시작한지 한 달도 채 안되서 내전 일부가 불에 타 버리고 2년 뒤에는 내전의

핵심 전각 830여 칸이 잿더미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 이후 고종이 창덕궁과 경복궁으로 이어와 환어를 거듭했기 때문에 건청궁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고종의 정무공간

 

 

 

 

건청궁이 주인을 제대로 맞이한 것은 고종 22년(1885년) 1월 이었습니다.

9년전 불탄 경복궁 내전을 복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금이 돌아온 거에요.

마땅한 거처가 없던 임금은 건청궁에서 정무를 관장하고 외교관을 만났습니다.

고종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건청궁을 편안하게 여겼습니다.

 

내전이 복구 된 뒤에도 거처를 옮기지 않고

아관파천을 할 때까지 12년간을 건청궁에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건청궁은 주요 정무공간으로 위상이 바뀌었고 정치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어요.

때로는 흥복전, 만경전, 함화당, 집옥재도 외교사절을 접견하거나 거처로 이용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장안당 뒤쪽의 관문각은 고종 25년에 세운 한국최초의 서양식 2층 건물입니다.

 

 

 

<관문각 터>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이 건물은 명성황후의 외국손님 접견과

연회장소로 이용 되었어요.

 

 

 

 

 

 

명성황후 역시 건청궁에 거처하는 동안

일본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러시아 등 서양 여러 나라와 활발한 외교정책을 폈습니다

 

조선지배를 발판으로 대륙 진출을 꿈꾸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명성황후가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었겠지요.

일본은 일명 '여우사냥'으로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1895년 음력 8월20일 (양력10월 8일) 새벽 5시, 48명의 자객들은 광화문 앞에서 홍계훈이 지휘하는

궁궐 수비대를 10여분만에 재압하고 광화문을 통과해 건청궁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살해 했습니다.

 

[승정원일기]에는 ‘칙령을 내리기를,

“지난번 변란 때에 왕후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그날 붕서(崩逝)하였음이

증거로 보아 틀림없다. 개국 504년 8월 20일 묘시에 왕후가 곤녕합에서 승하하였노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고종 32년 10월 15일).

이로써 건청궁은 한국 근대사 최대의 비극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어요.

 

황후의 죽음을 접한 고종은 1896년 2월, 신변에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것이 ‘아관파천’으로,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은 왕이 살지 않는 공간으로 남겨졌지요.

 

 

 

<조선총독부 미술관 별관>

 

 

 

일제강점기에 건청궁 일대의 건물이 헐려나갔고,

1935년에는 병합 25주년 기념 박람회장으로 사용되면서 철저히 훼철됐습니다.

1939년에는 건춘문 앞의 본관 건물이 좁다는 핑계로 이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 별관을 지었어요.

이 미술관은 광복 이후 민속박물관으로, 1995년부터는 전통공예 전시관으로 쓰다가 철거되었습니다.

이후 빈 공간으로 남겨져 있던 이곳은, 경복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건청궁 건물이 복원되면서 2007년부터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지금의 건청궁으로 이르게 되었습니다.

 

 

건청궁을 마지막으로 경복궁에 대한 포스팅을 마치고 다음은 창덕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올린 경복궁에 대한 글은 궁궐문화원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출처 : 궁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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