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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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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리다.

 

홍범도(洪範圖, 1868 1012(음력 827) ~ 1943 1025)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며,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다. 사냥꾼으로 활동하여 사격술에 능하였으며, 1910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다. 1943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76세로 사망하였다.

 

생애

평안도 양 서문안 문열사 부근에서 출생하여 평안도 양덕평안도 자성에서 성장한 그는 청년 시절부터 머슴, 건설현장 노동자, 종이공장 노동자, 사냥꾼, 광산 노동자 등을 전전하였다.

 

의병과 독립군 활동

28세 시절이던 1895년경부터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북도 갑산, 무산 등지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07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에 자극을 받아 갑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삼수·갑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만주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0 한일 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19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1920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이후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후에 독립군의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

 

강제 이주와 최후

1927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당했고, 그곳에서 집단 농장을 운영하였다. 1943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사후

1963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연보

1886 - 어렸을 적에 일찍 부모가 죽자, 여러가지 막노동을 전전. 제지공장에서 일하던 중, 친일파였던 공장주가 7달동안 품삯을 주지 않고서는 도리어 먹고 입고 잠잔 값을 받아야겠다고 하자 공장장을 살해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감. 총술과 검술은 이때 산생활에서 익혔다고 함.

1895 - 을미사변과 으로령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홍범도도 강원도 철령에서 봉기

1896 - 14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함경남도로 이동하여 유인석 의병부대에 합류. 을미의병 해산 후 포수로 위장하고 일제의 추적을 피함.

1907 -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정미의병 발발. 홍범도는 함병도 갑산 신포계 신포수 중심으로 의병 조직. 12월에 삼수 전투에서 일본군 함흥/북청/갑산 수비대를 궤멸시키는 등 대소 37회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국내에서 무력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함.

1919 10 - 평안북도 강계 만포진을 공략하여 일본군과 3일간 격전을 치르면서 70여 명을 살상.

1920 67 - 봉오동에서 일본군 19사단 소속 야스가와 소좌 휘하 부대를 격멸(봉오동 전투)

1920 10 - 청산리 대첩 참가. 김좌진과 공동 작전.

1921 6 - 러시아 자유시에서 소련의 해산 명령을 계기로 독립군 조직간에 분열이 발생하여 동족 상잔.(자유시 참변) 이후 대한독립군은 러시아 적군 소속으로 편입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하다.

1937 - 카자흐스탄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

1943 10 -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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