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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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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

 

이토 히로부미(일본어: 伊藤博文 (いとう ひろぶみ), 문화어: 이또 히로부미, 1841 1016 ~ 1909 1026)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 제국헌법학자, 정치가이다. 일본 제국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이며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역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5·7·10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3·8·10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 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일위(從一位)를 받고, 작위는 백작이며, 사후 공작으로 추증되었다. 영국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Univ. of London)에 유학하여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훗날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887부터 1889 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일본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자 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명은 도시스케(利助), 후에는 슌스케(俊輔, 春輔, 舜輔)로 불렸다. 슌보(春畝)소로카쿠슌준(일본어: 滄浪閣主人 (そうろうかくしゅじん))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春畝公)이라고 쓴 것도 많다.

한국에서는 을사늑약과 관련해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로, 일반적인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초기 근대 정치인의 한 사람이자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 기여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된다.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1909 614 통감직을 사퇴하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 1026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에게 총탄 3발을 맞고 피격 20여 분 만에 사망하였다.

사후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충정군(忠貞君)에 추봉되었고, 대한제국순종 황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을사늑약 체결과 조선통감 취임

러일 강화 조약 체결 이후 19051027일 한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는다는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구상이 내각 회의에서 통과된 이후 이토는 한국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1117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1905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관광을 갔다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을사늑약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청년 원태우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원태우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스스로 통감을 맡았다.

그리고 1906 3월 이토가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1907 522 을사늑약에 공을 세운 이른바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여 궁내대신으로 삼은 이 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또는 李載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의 스승을 자처한다. 유교적 학식이 있었던 그는 이은의 보호자이자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데리고 도일한다. 이토는 일본어와 군사 지식을 직접 가르쳤다 한다.

 

한국 고종 양위 주도

1907 71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전문이 한국 황실과 정부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한국 황제의 밀사를 자처하는 한국인 3명이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하면서 '1905년에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따라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헤이그 주재 일본공사가 외무성에 보낸 긴급 전문을 다시 외무성이 이토에게 전달한 것이다.

73일 이토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어디서 입수했는지 고종의 밀사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호소 친서의 초고라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이완용을 추궁했다. 이완용은 한때 친러시아파 인물이라 의심받고 있었다. 이토는 이완용에게 "이같은 행위는 보호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적대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협박했다.

이토의 추궁에 대해 이완용은 우선 이번 사건은 내각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며 선처를 빌었다. 이에 대해 이토는 "나 역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본국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완용은 이토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다가 거듭 사죄하고 물러 나왔다.

이토는 이어 73 오후 일본 해군 연습함대의 장교들을 데리고 황제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문제의 친서라는 것을 고종에게 보이며 책임을 추궁했다. 이토는 "이와 같은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대해 당당하게 선전포고하는 것만 못하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황제가 져야 하며 이런 행동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으로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선전을 포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총리대신에게 통고했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사건으로 이토가 일시 궁지에 몰린 듯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신문들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은근히 한국정부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한 이토의 책임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와 일본은 이 사건을 오히려 한국 정부의 주권을 말살하기 위한 호기로 역이용하기로 작정하고 우선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선전포고 운운의 협박을 한 것이다. 이후 이완용은 고종에게 순종의 황제 대리청정을 진언하였고, 고종은 처음에는 그의 대리청정 주장을 거부하다가 수용한다.

 

한국 고종 양위 사건의 여파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기 직전 순종에게 이완용의 진언대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게 한다. 그리고 고종은 그해 말 양위한다. 이토는 고종의 양위식에 참석하였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이를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식을 치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20일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했다.

순종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20일 그 시간에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완전히 불살라버렸다. 이 사건으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이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퇴직과 사망

19077월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09년 봄,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외상은 한국을 강제 합병할 방침을 정하고 이토와 상의했는데, 강제 합병 계획이 없다고 1907 밝힌 이후 평소 강제 합병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이토는 이 자리에서 강제 합병에 아무런 이의 없이 동의했다. 강제 합병 방침이 결정된 이후 이토는 1909 614에 통감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 1026 오전,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다. 향년 68. 장례는 1909114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근왕지사로서는 그는 동료들 보다 오래 살았다.(혁명가는 집안에서 죽지 않는다고 한다.)

 

사망에 이르는 과정

1909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은 이토가 코콥초프를 만나러 만철열차 편으로 뤼순과 하얼빈을 경유한다는 정보를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었으며, 안중근이 이토의 처단을 자원했다. 10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애초엔 둥칭 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창춘의 남창춘(南長春) 및 콴청쯔(寬城子)역과 도착지인, 차이자거우(蔡家溝) (다음 역인)하얼빈 의 4개 지점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자금, 인력이 부족하여 거사를 도착지(차이쟈거우 또는 하얼빈)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차이자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26 오전 9, 이토의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는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한 후 930분경 러시아 군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했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했다. 안중근은 총탄 일곱 발 중 세 발로 이토를 맞혔고,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그 곁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 그의 향년이 69세였다.

 

시신 운구 작업

이토는 바로 하얼빈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 출혈로 1026 오전 11시 경 사망했다. 죽음이 확인된 뒤, 그의 시신은 열차편으로 오전 1140분 하얼빈 역을 출발하여 오후 6시 장춘 역에서 쉬다가 다시 장춘을 떠나 19091027일 밤 다롄에 도착, 만철 병원으로 옮겨졌다. 만철병원의 영안실에서는 방부제인 포르말린 액이 투입되고, 총탄에 뚫린 세 군데에는 반창고를 붙였다. 이어 시신은 일본 천황이 보낸 회나무관에 들어갔다. 일본제국 군함 아키쓰시마(秋津洲)로 운구되었다. 시신은 동해를 출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와 모지(門司) 사이의 관문해협으로 들어섰다. 이어 111 오전 11시 도쿄 근처 항구 요코스카 부두에 입항했다.

시신이 도착하기 전, 요코스카 항에는 인파가 몰려 운구가 지체됐다. 111일 오후 1시경 시신은 인파를 비집고 6량으로 편성된 포차(砲車)에 실려, 2일 오후 1시경 신바시 역에 닿았다. 신바시 역 광장은 약 2천명의 출영자로 붐볐다. 시신은 2일 오후 240분경 아카사카 구(赤坂區) 영남판(靈南坂) 추밀원 의장 관저에 도착했다. 이 관저는 이토의 국장 기간 중 국장 사무소로 쓰였다.

 

국장 거행

추밀원 회의와 내각 회의는 이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했다. 시신이 도쿄로 운구되는 동안 장례식 준비는 완료됐고, 호송 의장병 책임자로는 일본 제국 육군 대장이, 국장의 건축 설계자로는 일본 근대건축의 원로인 내장두(內匠頭) 가타야마(片山東熊)가 임명됐다.

당시 정권강화와 일본 내부의 불만을 해결하기위해서 일본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권 안정화를 위하여 일본 국민들을 그의 장례식으로 단결시키기위하여 국장을 강제로 진행하였다.

국장일인 1909 114, 관은 오전 9시에 관저를 출발했고 노제는 히비야 공원에서 치뤘다. 오전 10시 반 히비야 공원에서 유럽식으로 열린 이 국장의 참배객들은 대부분 서양복을 입었으며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및 러시아인 외교관들과 내외빈의 조사가 낭독됐다. 50년 친구라는 후작 이노우에 가오루'낙담이 아주 격했다'는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메이지 천황'왕정 복고, 유신 공헌, 헌법 초창, 조선 지도 등 공헌'의 결과로 이토를 충정군(忠貞君)으로 추봉하고, 백작에서 공작으로 추증했다.

식이 끝나자 이토의 시신은 마차에 옮겨졌다. 영구는 장지인 도쿄 도 임원군(荏原郡) 대정정자 곡수분영(大井町字 谷垂墳塋, 지금의 도쿄시 시나카와 구(品川区) 곡수묘지(谷垂墓地))에 안장됐다. 그의 묘역은 묘역 15백 평을 도쿄시 예산으로 사들였다. 장남인 농상무 서기관 이토 분키치(伊藤文吉)가 앞장섰고, 시신은 오후 230분 묘지에 도착했다.

매장이 끝나고 유족과 일부 대관들은, 묘역에서 가까우며 천황이 1906이토에게 준 저택인 오모리(大森)의 은사관(恩賜館)으로 향했다. 이곳은 현재 시나가와 구에 속하고 광우구락부(光友俱樂部)가 되어 있다(소유; 일본광학공업). 그 집 앞길은 이토 도로(伊藤道路)라고 불린다. <태양> 임시증간호 <이등박문공(伊藤博文公)>은 장례 후 6일뒤인 19091110일에 발행됐는데 이 책에 이토의 무덤이 실렸다.

 

조선의 반응

대한제국 순종114,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조선민족 대표 조중응을 이 국장에 보내고,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해서 이토 가족에게 은사금으로 10만원을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 황실의 이와 같은 반응은 이미 국권이 대부분 넘어간 상황인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고, 일제의 계산된 공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후 경성부 종로에 이토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남산 근처에는 대형 신사인 박문사가 건립하며 조선 각지에 이토의 동상을 세웠으나, 이 동상들은 1945 12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후에는 모두 파괴됐다.

 

사후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국방력과 국력의 향상에 기여했으며, 일본 근대 헌법의 제정과 일본 양원제의 확립에 기여했다. 1963 111에 발행된 세 번째 1,000엔 지폐의 도안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1984 111에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로 바뀔 때까지 유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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