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운동,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
동학 농민 혁명(東學農民革命), 동학 혁명, 동학 농민 운동 또는 동학 농민 전쟁(東學農民戰爭)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제 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제 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 3차)로 나뉜다.
교조 최제우의 신원 외에도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1882년(고종 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그리고 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도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 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은 바 있었다.
한편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들 중에는 전봉준, 김개남 외에도 손화중, 이방언 등 농민군 남접의 최고 지도자들 상당수가 흥선대원군과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흥선대원군과의 연대를 못마땅히 여긴 김개남은 수시로 전봉준과 충돌하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방언은 농민운동 진압 직후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사면을 청하여 석방되었으나 민씨 계열의 관군에 의해 살해된다. 그밖에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의 지도자들은 남접의 거병에 쉽게 호응하지 않다가 그해 9월의 3차 봉기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개화파 지도자이자 망명정객인 윤치호는 동학 농민 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 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 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배경
1882년 이후의 각종 사회 혼란과 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하던 가운데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도화선이 되어 농민운동을 야기하였다.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청나라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톈진 조약을 파기시킬만큼) 민씨 정권에서 청나라 군을 끌어들여 개화파를 진압하자, 일본은 일본대로 청나라가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북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혼란은 점차 가중화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급기야 그것은 1894년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평가
동학 농민 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간단하게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이다. 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항쟁이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후에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과 동학인의 지도하에 일어난 농민 항거라는 점에서 이전의 민란과 다르며, 외세 배척을 목표로 했다는 점도 처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조건하에서 동학농민전쟁은 몇 가지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농민군은 조선 관군을 넘어선 외세의 개입에 대하여 맞서 싸울 만한 효과적인 무기와 병력이 부족하였다. 둘째, 농민들 중심의 동학군에 대항하여 기득권을 가진 향촌사회의 지주·부호·양반들의 민보단(民堡團)등을 통한 저항을 과소 평가하였다. 셋째, 사회 개혁을 위한 혁명을 수행 하면서도 대원군에 의지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더구나 동학군 내 과격파는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였고, 온건파 중 전봉준 등은 흥선대원군과 협력하는 등 동학군 내부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지도 않았다는 단점도 있었다.
전봉준이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와 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 동학 농민 운동은 애국적이고 애민적인 동기에서 일어난 구한말 최대의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었다. 한편, 농민군이 근대적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혁명이나 계급전쟁을 꿈꾸었다는 민중주의 역사가의 견해도 있다. 결국, 동학농민전쟁은 순박하고 애국적인 농민들의 자기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층의 반일애국주의가 다음 시기의 의병운동에 양반유생과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성숙성을 보여주게 되었으며, 농민들의 내정개혁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반영된 내용으로는 과부의 재가 허용과 신분제 폐지 등이 있다. 그러나 이 개혁에는 농민들의 소망이었던 토지 개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김개남 등 일부 과격파의 국왕 참칭이라던가, 전봉준 등 일부는 흥선대원군 등과 내통했던 점 역시 대중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을수 없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
대원군과 전봉준
1888년(고종 25) 무렵 전봉준은 손화중(孫和中)과 접촉했다. 그리고 그의 인도로 동학에 입도한다. 1890년 무렵 전봉준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의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장옥(徐璋玉)의 막료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다. 뒷날 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로 관군에 체포된 뒤 1895년 일본 영사관에서 있었던 제2차 재판에서 "동학은 수심(守心)하여 충효(忠孝)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道)였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고 하여 스스로 동학에 입교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그러나 전봉준은 1890년 운현궁을 찾아갔다. 이후 1890년대 초반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48] 1892년 초 전봉준은 운현궁 문객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인 전라북도 고부군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동리 서당의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1893년 2월 전봉준은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전봉준과 천우협
한편 세이토지 시치로(清藤寺七郞)의 저서 《천우협》(千佑俠, 지유쿄)에서는 1894년 6월 27일에 부산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의 정치 폭력 조직 천우협 회원 일부가 전봉준을 만나 동학 동민 운동을 지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천우협》에 나타난 만난 곳과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 나타난 장소가 다르며,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서는 당시 전봉준을 따른 군세는 고작 20여 명이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5백여 명으로 기술하여 그 수치가 매우 차이가 크다. 결정적으로 《천우협》에 나타난 시기인 6월부터 8월 말까지는 전혀 전투가 없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천우협 회원들과 전봉준 일동이 협조하여 관군을 격파했다고 하였다. 전봉준은 흥선대원군 계열 외에도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청나라 세력을 몰아낼 목적으로 천우협의 회원들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의 폭력 조직 천우협은 팔굉일우를 바탕으로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바닥에 깔고 있는 조직으로 다른 나라의 독립이나 부국 강병을 도울 만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천우협》이 전봉준이나 동학군을 도우려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는 시각도 있다.
한편 동학측 자료에서도 전봉준과 천우협(天佑俠)의 접촉을 확인해주고 있는데 『천도교 창건사』에 의하면 "일본인 다케다 노리유키(武田範之) 등 15명이 금시계 1개와 마노(瑪瑙) 하나를 보내어 믿음을 보이고 면회를 청한 즉 전봉준이 거리낌 없이 이들을 면담하고 시국을 서로 논하였다'하여 전봉준과 천우협 측의 면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민씨 세력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일 때만 해도 천우협은 동학 농민 운동에 호의적이었지만, 일본군까지 진압에 끌어들이게 되자 다소 애매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이 완전히 진압되어 사태 수습이 어렵다고 여겨지자 천우협은 동학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이 진압된 뒤 천우협은 다시 동학측과 사람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한다.
흥선대원군의 농민운동 사주
한편 흥선대원군이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 — 1894년 2월 21일,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Mikhail Hitrovo)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칼 베베르(Karl L. Weber)에게 보낸 비밀 정보
한편 흥선대원군은 동학 농민운동이 진압된 뒤, 농민군의 한 사람인 이방언이 처형당하기 전에 살려주었다. 그러나 이방언은 고향으로 내려다가다 전라도관찰사가 잡아다가 그 아들과 함께 불에 태워 죽였다.
그 증손자의 증언에 의하면 '대원군과 접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증거로서 석대전이 끝나고 그 양반이 잽혀서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자기조 사형 아니면 무죄 방면, 지금 나온 재판 기록에 엊그저께가지도 총무처 기록보관소에서 재판기록 책을 보냈습디다. 그 양반은 무죄 방면이 되지 않았습니까? 무죄 방면이 될 수가 없는 분이었는데. 그렇게 된 것은 대원군이 주선을 해서 무죄 방면을 받았다.[53]'고 한다. 이어 이방언의 증손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래가지고 (이방언이) 고종 앞에까지 가서 귀화초식이란 말이 뭔 말인지는 모르지만, 돌아올 때[53] 귀자, 될 화자, 풀 초자, 먹을 식자, 귀화초식의 승봉을 받고, 나락 평정이 되면 다시 부를 테니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때 국가에 공을 세워라 하는 크나큰 은전을 입고 내려왔는데'라는 것이다.
이방언과 흥선대원군과의 관련설은 송기숙이 녹두장군에도 썼듯이 꾸준히 이야기꺼리가 되고 있다. 이런 관계로 하여 이방언은 무죄 방면되었다는 것이다.(총무처 기록보관소 발행의, 동학관련판결문집 참고). 그러나 이방언은 놓여 나와도 곧바로 고향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방언의 증손의 증언에 의하면 '동학은 피차가 출혈이 많고 사상자가 많이 나서 여기로 바로 못 오시고 회천면에 있는 보성 군수에게로 갔대. 보성 군수가 이상한 것이 그 말이 맞어들어가. 거시기를 보면 보성 군수가 재판을 받았어요. 군수도 동학에 협조했다고 해가지고. 근데 보성 군수도 무죄 방면을 했어. 그 사람도 동학에 협조한 사람이여. 보성 군수의 협조로 보성군 회천면 쇳대에 은신해 있다가 전라 감사의 재체포령에 의해서 잽혀가지고 장흥 장대에서 자기 외아들 성호와 같이 동참을 당하셨어요. 지금 성운고등학교 자리라고 그럽디다. 그러니까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총살도 아니고 효수도 아니고 산 사람을 묶어놓고 그 위에다...' 흥선대원군의 탄원으로 살아난 이방언은 전라도 관찰사에 의해 처형당한다. 이방언은 짚을 씌워 불에 태워죽이는 분살형을 당했던 것이다. 그래도 시신을 집안 어른들이 수습해서 묘를 쓴 것은 여느 농민군 지도자들의 경우보다 나은 편이었다.
김구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김구는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고 몸을 숨겼다.
기타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헌부감찰인 윤치소(尹致昭)는 아산 출신 조중양과 함께 300명 정도를 모아서 의병 을 조직하고 창의통문을 천안, 아산, 온양 지역에 돌리고 천안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그는 일제하 대지주이자 사업가로서 친일로 변신, 해평 윤씨 일족인 윤웅렬, 사촌인 윤치호 등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윤치소는 후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 되는 윤보선, 경기도지사를 지낸 윤원선의 아버지였다. 한편 동학농민군 고령, 성주 지역의 접주로 활동하다 체포, 사형을 모면한 박성빈은 대한민국의 5~9대 대통령을 지낸 군인 출신 정치인 박정희의 아버지이자 총리 김종필의 처조부가 된다.
1894년 10월 토포사 윤영렬은 아산(牙山)에 사는 조중석(趙重錫)과 함께 장정 300명을 모아 천안군 목천면에 출몰한 도적을 토벌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의 토벌에 참여한다. 윤영렬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조중양과 함께 토벌군에 별군관으로 차출되었다. 별군관으로 차출된 그는 관군 외에도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어 관군과 의병 병력을 이끌고 충청남도 아산과 천안 일대의 동학 농민군토벌에 참여하였다. 윤영렬은 윤보선 대통령의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상하이에 망명중이던 윤치호는 동학 농민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패 원인
명성황후는 2차 봉기 때는 청나라군을 끌어들였고, 3차 봉기 때는 일본군을 끌어들여 교전케 하였다. 2차 봉기 때에는 전주 화약을 체결하였지만 3차 봉기때는 일본군과 조선 관군, 청나라군과 관군 연합군의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또한 정권 전복을 원치 않는 북접의 반발과 왕실을 부정하는 남접 내 급진파의 존재 역시 농민군의 내분을 불러왔다. 동학군 남접이 2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 남접과 서포의 군사에 대한 북접의 비협조 역시 농민군의 활동을 어렵게 했다. 논산에서 북접군과 남접군이 합류한 것이 10월 9일이니 봉기 결정 후 한 달을 끌었다. 북접과의 연합에 너무 시간을 소비했고, 또 남원의 김개남 부대가 독자 행동을 한 것 역시 세력 약화의 한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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